[전설의 파이터] 4전5기의 신화 ‘불사조’ 홍수환 ⑮
[전설의 파이터] 4전5기의 신화 ‘불사조’ 홍수환 ⑮
  • 김갑상 기자
  • 승인 2019.03.2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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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7월 3일, 이른 아침부터 장대 같은 소나기가 한반도 전역을 적시고 있었다. 속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맛비속에 세인들은 전파사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진공관 라디오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엄마, 나 참피언 먹었어!”
“그래, 수환아 장하다. 대한민국 만세다 만세야!”

지구 반대편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네 차례나 캔버스에 패대기치고 WBA 밴텀급 왕좌에 오른 후 한국에 있는 어머니와 전화통화 하는 것을 전 국민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속에 감동으로 채우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자랑하는 초대 세계챔피언 김기수가 1966년 6월 25일 이탈리아의 영웅 니노 벤베누티로부터 왕좌를 쟁취한 후 1968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3차 방어전 상대 산드로 마징기에게 석패한 뒤 홍수환이 건국 이래 두 번째로 세계를 재패하는 순간이었다.

장차 대한민국 복싱계의 찬란한 빛으로 남을 홍수환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기 한 달 전 1950년 5월 25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다. 수송초를 거쳐 중앙중으로 진학한 그는 앞날이 촉망되는 새내기 야구선수였다.

카라스키아와의 대전
카라스키아와의 대전

그러나 중앙고 시절 복싱을 끔찍이도 좋아했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그는 복싱으로 전환한다. 딱히 유언을 남긴 것도 아니지만 그때 당시로서는 무엇에 이끌린 듯 그렇게 복싱의 세계에 발을 담근다.

1969년 5월, 그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 김상일과 4회 무승부로 험난한 강호에 홍수환이라는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킨다. 강호에 입문한지 2년 후 그는 문정호를 5회에 날려버리고 한국 밴텀급 타이틀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세 차례에 걸쳐 타이틀을 방어한다.

1972년 6월, 홍수환은 알 디아즈를 홈 링 서울로 불러들여 12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동양챔피언에 오르며 천하재패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다. 동아시아를 한손에 움켜 쥔 그는 파죽지세로 진군한다.

44전의 일본의 백전노장 오키 시게요시를 12회 판정으로 물리치고, 태국의 기린아 12전승 9KO승에 빛나는 수코타이 타놈치트 마저 텃세로 유명한 적지 방콕에서 난타전 끝에 8회에 요절내고 만다.

그러나 인생사 호사다마라 했던가. 수코타이와의 혈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귀국한 그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향기로운 꽃다발이 아닌 군 입대 영장이었다. 어쩌겠는가. 병역 의무는 이 땅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 아들들의 숙명이었다.

홍수환은 흔쾌히 자신의 숙명이자 의무를 받아들인다. 1973년 2월 13일자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입대한다. 입대 후 그는 부대장의 배려로 복싱을 계속할 수 있었다. 군 생활은 그에게 임전무퇴의 정신력까지 장착한다.

입대한 그해 11월 에디 살로마를 대구에 불러 판정으로 제압하고 그 다음해 2월 일본의 노장 와타누키 세이치를 마저 패대기치고 4차 방어에 성공한다. 그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세계랭킹에 이름을 내민다.

강호에 입문한지 5년의 세월, 마침내 그에게 천하재패의 기회가 찾아온다. 상대는 남아프라카공화국의 아놀드 테일러.

아놀드 테일러는 자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치러진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멕시코의 로메오 아나야를 14회 역전 KO승으로 남아공에 20년 만에 맹주의 자리를 선물한 맹장이었다.

맹주에 오른 그는 쉬어가는 기분으로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있는 무명의 선수를 지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우매한 결정은 천추의 한으로 남게 된다. 그런데 홍수환에게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친다.

테일러를 누르고 공항에서 어머니와 함께한 홍수환 (출처 동아일보)
테일러를 누르고 공항에서 어머니와 함께한 홍수환 (출처 동아일보)

그때 당시 일반인도 외국에 나가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현역 군인의 신분이었다. 다행히 부대장의 노력과 복싱계 관계자 그리고 전 국민의 염원이 마침내 정부를 움직였다.

만약 남아공이 인종차별를 하지 않는 국가였다면 한결 수월할 수도 있었던 일이였다. 덤으로 부대장의 협박(?)도 따랐다. “홍수환 일병, 만약 지고 귀국한다면 넌 바로 영창감이야.”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적지 더반으로 날아가서 벨트만 빼앗아 오면 그만이었다. 시합을 수개월 앞두고 부대장은 그의 평생 은사인 김준호 트레이너 집에 머물며 훈련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홍수환은 매일 남산을 제집 드나들듯 오르내렸다. 결전의 날이 눈앞에 다가올수록 훈련의 강도는 더해갔다. 그리고 자신감도 충만해 갔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 했는데 당시 홍수환이 아놀드 테일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전 챔피언 아나야를 누르고 벨트를 거머쥔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가 백인이고 자신보다 키가 조금 더 커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시각각 결전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홍수환에게 또 다시 시련이 닥쳐 오고 있었다. 당시 남아공은 우리나라와 국교가 없어 비자를 발급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 일본으로 먼저 날아갔다.

일본에 도착 후 그곳에서 비자를 발급받아 다시 홍콩으로 날아갔다. 홍콩에서 인도로, 다시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다시 스리랑카에서 남아공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결전의 장인 항구도시 더반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여섯 번 갈아타고 무려 35시간의 긴 여정이었다. 1974년 7월 3일 남아프리카공화국 항구도시 더반, 웨스트 리지 테니스 스타디움. WBA세계밴텀급 타이틀매치.

홍수환은 전의를 다지며 경기장의 입구를 열고 입장한다. 그런데 낯선 이국에서 관중석 어디선가 ‘홍수환’ ‘홍수환’을 연호한다. 만 이천여명이 넘는 남아공의 관중들에게 에워싸여 있어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목이 터져라 대한의 아들 홍수환을 연호한다.

그랬다. 그들은 더반에 잠시 머물러 있던 약 20여명의 원양어선 선원들이었다. 그 당시 못 먹고 못살던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가족을 위해 돈이 되는 일은 그곳이 어디든 목숨까지 아끼지 않던 시절이었다.

자모라와의 대전
자모라와의 대전

홍수환은 그 사실을 알고 온 몸이 전율이 왔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너인 김준호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선생님, 저가 링 위에서 죽더라도 절대 타월을 던지지 마십시오.”

머나먼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는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기필코 이겨 대한민국 국민과 목이 터져라 외치는 그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이렇게 도전자 홍수환은 승리를 위한 방정식이 하나 둘씩 풀려 가는데 반대로 챔피언 테일러는 시합이 있기 두 달 전 요하네스버그에서 벌어진 논타이틀전에서 로렌조 트루질로에게 쩔쩔매다 판정으로 패하고 만다.

한마디로 메인시합 전 초를 치고 온 셈이다. 여하튼 이래저래 상황은 홍수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챔피언은 42전 36승(11KO) 1무 5패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이에 맞선 도전자 홍수환은 13연승을 포함해서 28전 24승(7KO) 2무 2패의 전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김준호 트레이너는 이곳은 적지이고 판정으로 가면 불리하니 1회전부터 상대의 콧대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으니 기습전으로 상대의 혼을 빼놓자고 제안한다. 1회 공이 울리자 도전자는 중반까지 탐색전을 전개하다 갑자기 거세게 몰아 부친다.

그날따라 홍수환의 레프트 훅과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허공을 가르는 법이 없었다. 던지는 족족 그림처럼 테일러의 안면에 적중되고 있었다. 종료와 동시 도전자의 롱 훅이 테일러의 안면에 적중하자 캔버스에 드러눕는다. 공이 챔피언을 구제해 준다.

2회부터 정신을 차린 테일러는 나름 선전해 보지만, 5회 또 다시 도전자의 연타에 쓰러진다. 주심의 느린 카운터가 그를 다시 회생시켜 준다. 11회, 홍수환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전진하다 테일러의 강력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맞고 왼쪽 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한다. 만약 귀가 아니고 안면에 정통으로 맞았다면 승리는 도전자의 몫이 될 수 없었을 것이었다.

12회, 심판은 도전자를 링 닥터에게 보인다. 부상을 핑계로 경기를 스톱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TKO패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다행히 시합속개가 선언된다.

현재의 홍수환 (출처 한겨레신문)
현재의 홍수환 (출처 한겨레신문)

14회, 열세를 절감한 테일러는 마구잡이로 들어오다 세 번째 다운을 허용하고 만다. 이미 승리의 추는 기울고 있었다.

15회, 열세를 직감한 챔피언이 무모하게 덤비다 네 번째 다운을 허용한다. 관중석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합 전에 테이프가 없어 국가연주를 생략했는데 우리의 선원들이 힘차게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의 서러움을 링 위에서 싸우는 홍수환도 그랬고 이역만리 타국의 바다를 누비며 거센 파도와 싸워가며 오로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선원들도 너무나 잘 알기에 애국가는 그들에게 설움을 이기는 힘이고 또한 에너지의 원천이가도 했다.

홍수환은 그들의 성원에 힘입어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붓는다. 그렇게 마지막 라운드의 공이 울린다. 그리고 장내 아나운서의 채점표가 발표되었다.

“더 위너 앤 뉴 챔피언 홍수환(The winner and new champion soohwan Hong)”

김기수 선수에 이어 대한민국 프로복싱 역사상 두 번째 반열에 그 이름을 올려놓는 순간이었다. 홍수환이 각본 각색한 ‘더반’의 드라마는 그렇게 화려하게 막이 내리고 있었다.

귀국 후 그는 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홍수환은 그렇게 국민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 올 방어전을 위해 마냥 기쁨에 들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맹주에 오른 그해, 홍수환은 두 차례 논타이틀전을 판정으로 모두 승리하고 12월에 있을 1차 방어전을 준비한다. 상대는 필리핀의 페르난도 카바넬라였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1차 방어전은 그저 그런 복서인 카바넬라에게 의외로 고전하다 2:1 판정으로 힘겹게 타이틀을 방어한다.

홍수환에게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2차 방어 상대는 멕시코가 자랑하는 ‘작은 포식자’ 20전승 20KO승의 알폰소 자모라였다.

1975년 3월 14일, 제3국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치르진 방어전에서 홍수환은 자모라의 무쇠와 같은 헤머 펀치를 견디지 못하고 4회 2분 27초 만에 너무나 허무하게 무릎을 꿇고 만다. 화려한 등장에 비해 초라한 퇴장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홍수환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선다. 두 달 후 존 매자를 서울로 불러 2회에 그가 자랑하는 속사포로 캔버스에 내동댕이치고 자신의 건재함을 알린다.

이후 홍수환은 7연승(5KO)을 달린다. 그 중에는 자신이 반납한 동양챔피언 벨트까지 되찾아 온다. 와신상담, 홍수환은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준 자모라를 서울로 부른다. 1년 6개월의 세월이 지나 있었다.

1976년 10월 16일, 인천에서 벌어진 자모라와의 재대결에서 12회 로프에 몰린 홍수환이 몇 차례 펀치를 허용하자 이해하기 힘들게도 옥타비오 메이란 주심은 경기를 중단시킨다.

분명 충분히 싸울 여력이 있었고 그때까지 포인트 면에서도 박빙을 유지하고 있었다. 패배 후 낙담에 빠져있는 홍수환에게 희소식이 들려온다. WBA에서 밴텀급 보다 한 체급 위인 주니어 페더급을 신설한다.

초대 챔피언을 노리고 수많은 고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밴텀급은 멕시코의 위대한 Z-boys 카를로스 자라테, 알폰소 자모라가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고 있어 강호를 떠돌던 고수들이 신설된 체급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홍수환도 그 대열에 빠르게 합류하여 미국의 콘라도 바스케스, 한국의 염동균, 일본의 다나카 후타로를 차례로 제압하고 대망의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게 된다. 상대는 파나마의 ‘지옥에서 온 악마’ 헥토르 카라스키아.

당시 파나마는 복싱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현직 챔피언을 4명이나 보유하고 있었으며 국민들은 카라스키아가 다섯 번째 맹주에 오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77년 11월 26일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시티, WBA 주니어 페더급 챔피언 결정전.

당시 카라스키아는 11전승 11KO승을 자랑하는 열일곱 살의 작은 악마였다.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재봐야 아는 법, 홍수환은 적지에서 싸우는 만큼 판정까지 가고 싶은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1회부터 양 선수는 링 중앙에서 난타전을 전개한다.

2회, 카라스키아는 초반부터 맹공을 퍼붓기 시작한다. 작은 악마의 폭풍우에 홍수환은 네 번의 다운을 허용한다.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찬 홈팬들은 축포와 총을 쏘며 광란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당시 원정 중계를 하던 동양방송(TBC) 아나운서도 절망에 젖어 할 말을 잇지 못하고 안타까움만 남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광란 속에서도 홍수환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시합은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3회, 끝을 보겠다는 결연함으로 미친 듯이 파고드는 카라스키아의 안면에 홍수환의 통렬한 라이트가 적중한다.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며 뒤로 물려서는 상대를 보고 홍수환은 상처 입은 먹잇감을 본 맹수처럼 날이 선 시퍼런 칼날로 카라스키아를 유린한다.

1분 4초, 모든 것이 끝이었다. 카라스키아는 죽은 사람처럼 캔버스에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새로운 초대 챔피언의 탄생이자 대한민국 최초로 2체급을 석권하는 쾌거였다.

홍수환의 통쾌한 승리에 대한민국 들썩였다. ‘4전 5기의 신화’, ‘불사조 홍수환’ 모든 언론들은 홍수환의 이름으로 도배를 했다.

2체급을 석권한 후 일본의 가사하라 유를 상대로 동경 코라쿠엔 체육관으로 원정, 15회 판정으로 물리쳤지만 서울에서 열린 2차 방어전에서 콜롬비아의 리카르도 카르도나에게 잽에 고전하다 12회에 무릎을 꿇고 만다.

그렇게 위대한 전설 홍수환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인 옥희와 염문을 뿌리다 한국 권투위원회로부터 출장정지 처분까지 받는다.

2년 7개월 후 제재에서 풀린 후 다시 그리운 링으로 돌아와 염동균과의 라이벌전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 ‘불사조 홍수환’ 그는 현재 대한민국 복싱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은퇴 후 미국 알래스카로 건너가 택시운전, 미군부대의 복싱코치를 거쳐 1992년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1978년에 헤어진 옥희와 1995년 1월에 재결합한다.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고 있다.

홍수환은 현재 서울 대치동에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2008년 한국권투인협회 회장, 2012년 한국권투위원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대한민국 복싱의 전설 홍수환’ 그는 우리가 춥고 어두운 시절을 지나 올 때 우리에게 용기와 꿈을 심어 주었고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도 몸소 실천한 거목이었다.

홍수환 생애 통산 전적 50전 41승(14KO) 4무 5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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