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별 ‘파괴자’ 카오사이 갤럭시 ⑪
태국의 별 ‘파괴자’ 카오사이 갤럭시 ⑪
  • 김갑상 기자
  • 승인 2018.09.0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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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츠구유키, 오하시 가즈유키, 주유억, 주문군, 마르시아노 세키야마, 박찬영, 시라누이 조, 엄재성, 문영리, 이동춘, 최창섭, 정병관, 송갑섭, 최창호, 장태일, 마츠무라 겐지(2회), 나카지마 준이치, 김용강, 박재섭.
이상은 포악한 절대 독재권력 ‘태국의 별’ 카오사이 갤럭시에게 항거하다 그의 묵검(墨劒) 아래 이슬처럼 사라져간 한국, 일본 양국의 자객(刺客) 명단이다. 그는 두 나라 자객들에겐 한마디로 철천지 원수에다가 한편으론 저승사자이며 악마였다.


열아홉 명이 스무 번의 비무(比武)에서 그중 열일곱 번은 마지막 라운드 공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공포와 전율 그 자체였다. 1959년 5월 15일 태국 펫차분 주(州), 장차 세계 복싱사에서 가장 위대한 챔피언 중 한명으로 추앙받게 될 ‘수라 사엔캄’이 그의 쌍둥이 형과 함께 태어난다.

라파엘 오로노와의 대전(사진 블로그 토미의 복싱뉴스)
라파엘 오로노와의 대전(사진 블로그 토미의 복싱뉴스)

그의 고향 펫차분은 ‘농작물이 풍성한 도시’를 의미한다. 100만의 인구와 매혹적인 자연과 1400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 소수민족의 전통 의식과 같은 잠재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한 주(州)다.

으레, 태국의 사내라면 누구나 그렇듯 수라 사엔캄 역시 어릴 적부터 최강의 ‘낙무아이’(무에타이 선수)를 목표로 무에타이 세계에 발을 들인다. 느리지만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그는 1980년 정월, 격투의 성지(聖地) ‘룸피니’에서 최고의 낙무아이가 된다.

펫차분의 시골뜨기 수라 사엔캄은 이후 세인들에게 두고두고 전설이 될 ‘카오사이 갤럭시(Khaosai Galaxy)’라는 이름을 하사 받는다. 낙무아이의 최고 권력자가 된 그는 10개월에 걸쳐 수십 명의 도전자를 도륙한다.

그러자 그의 강력함에 질려 더 이상 자신의 아성에 아무도 도전장을 내밀지 않는다. 위대한 전사의 칼은 그렇게 녹이 쓸고 공허감과 함께 고독은 밀물처럼 밀려온다. 그해 12월 고독은 결국 유혹을 낳고 그 유혹은 프로복싱으로의 전환이었다.

카오사이 갤럭시는 태국의 돈 킹이라 불리는 니와트 라오수완 프로모터와 손잡고 12월 17일 팍 스리탐을 5회에 요절내고 강호에 입문한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 한 살이었다. 프로모터 니와트는 카오사이의 파괴력은 분명 복싱계에서도 통할 것이라는 확신에 2년여의 구애 끝에 결국 그를 전향시키는데 성공한다.

데뷔 후 6연승(5KO)을 수확한 후 1981년 7월 29일 태국 밴텀급 타이틀에 도전하지만 ‘삭 삭수리’에게 10회 판정으로 패한다. 이 패배는 그에게 생애 유일한 패배로 기록된다. 삭삭수리에게서의 패배는 그를 한 단계 성숙시킨다. 그리고 그는 이후 상대가 누구든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다.

1981년 10월부터 1984년 9월까지 18연승(16KO)을 쓸어 담는다. 그중 한국의 자객 주유억, 주문군, 박찬영, 엄재성, 문영리가 희생된다. 쉼 없이 앞만 보고 전진하던 그에게 천하재패의 기회가 찾아온다. 일본의 와타나베 지로의 타이틀 박탈로 인해 공석이 된 WBA 주니어 밴텀급타이틀 결정전이었다.

새로운 맹주로 등극한 카오사이 갤럭시(사진 블로그 마음의 소우주)
새로운 맹주로 등극한 카오사이 갤럭시(사진 블로그 마음의 소우주)

상대는 동급 2위 도미니카 공화국의 강타자 에우제비오 에스피날이었다. 에스피날은 당시 11승(10KO) 2무로 무패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1984년 11월 21일 태국 방콕, 자신의 홈 링에서 그는 에스피날을 6회에 실신시키고 전설의 서막을 전 세계 복싱팬에게 알린다.

맹주에 등극한 그는 향후 7년 1개월간 철저한 독재 권력으로 자신에게 항거한 무수한 자객들을 제압한다. 첫 번째 희생자는 20승(10KO) 5패 1무의 한국의 이동춘이었다. 하지만 그는 7회까지가 한계였다. 왕좌에 오른 후 최초의 방어전은 그렇게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2차 방어 상대는 우리나라에게도 잘 알려진 베네수엘라의 기교파 복서 라파엘 오로노. 그는 한국의 이승훈에게서 타이틀을 뺏어간 후 김철호에게 패하며 타이틀을 헌납한다. 하지만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재도전, 타이틀을 획득하지만 4차 방어에서 패한 후 무관이 되어 세 번째 맹주의 자리를 노리는 강적이었다.

32승(16KO) 2무 2패의 도전자 오로노는 빠른 발과 긴 리치를 이용, 철저한 아웃복싱으로 4회까지 점수를 벌어 놓지만 5회 카오사이는 기어코 도전자를 우리 안에 가둔다. 육중한 해머 펀치가 도전자의 육신을 유린하자 보다 못한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킨다.

카오사이에게 패한 오로노는 이후 자신의 전적에 5패를 더한 후 쓸쓸하게 세인들에게 잊혀져간다. ‘링 위의 파괴자’ 카오사이 갤럭시의 철권통치는 거침이 없다. 전 세계에서 내 노라 하는 자객들이 그를 위협하지만 그는 마치 거대한 바위와 같이 흔들림이 없다.

1985년이 저물어 가는 12월, 챔피언은 13승(9KO) 1패의 전적인 파나마의 신성 에드가 몬세르트의 민란을 단 5분 만에 제압하고 3차 방어에 성공하며 그가 결코 예사롭지 않은 맹주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3차 방어전이 끝나고 11개월 동안 항거하는 자객이 없어 태평성대의 시대를 만끽하는 것도 잠시 베네수엘라의 무패의 절정고수 이스라엘 콘트라레스가 24승(16KO) 1무의 전적으로 무장하고 도전장을 내민다.

위대한 지존 카오사이 갤럭시
위대한 지존 카오사이 갤럭시

하지만 챔피언의 분노에 찬 주먹질에 도전자는 14분 만에 링 바닥을 기어 다닌다. 그렇게 도전자의 허세를 천하에 알리며 4차 방어의 벽을 넘는다. 1987년 카오사이는 두 번에 걸쳐 방어전을 벌인다.

엘리 피칼을 14회, 한국의 정병관을 3회에 차례로 박살내고 6차 방어까지 전 KO승을 거둔다. 7차 방어 상대는 자국의 ‘낙무아이’ 출신 콘트라니 파야카룬. 그 역시 12(1패)승 중 아홉 번의 KO승이 있는 강타자였다. 결과는 12회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이었다.

이 경기에 패한 파야카룬은 카오사이가 있는 한 자신의 미래는 없다고 판단, 복싱의 세계를 미련 없이 떠난다. 파야카룬의 주먹도 강했지만 카오사이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무에타이에 입문해 수많은 사투를 벌여 온 탓에 대개 하이 킥 또는 니킥에 의해 턱이 망가진 무에타이 출신 복서들과 달리 카오사이의 턱은 강철 그 자체였다. 웬만한 주먹으론 그에게 그 어떠한 충격도 줄 수 없었다.

7차 방어전을 마친 그해, 그의 형 카오코 갤럭시도 WBA 밴텀급 세계챔피언에 올라 형제 챔피언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지만 카오코는 카오사이의 위대함에 가려 영원한 ‘덤’으로 살다 사라진다.

홈 링을 고수하던 카오사이가 1988년 10월, 8차 방어 상대 한국의 최창호를 대적하기 위해 서울로 날아간다. 홈 관중의 앞도적인 성원을 등에 업고 나선 도전자 최창호, 하지만 8회 52초 만에 무릎을 꿇고 만다. 실력이 뒷받침이 안 된 정신력은 소용없다는 것을 증명한 한 판이었다.

1989년 1월 15일. 최창호의 복수를 위해 장태일이 비수를 품에 앉고 적지 태국으로 날아갔지만 단 5분 만에 카오사이의 명성만 더 높여주고 산화해갔다. 그해 4월, 이제 12전의 햇병아리가 겁도 없이 챔피언을 일본 요코하마로 부른다. 카오사이에게는 10차 방어전이었다.

카오사이 갤럭시와 김용강의 대전
카오사이 갤럭시와 김용강의 대전

겁 없는 도전자 마츠무라 겐지는 의외로 선전, 판정까지 가는 투혼을 발휘하지만 결국 심판전원일치 판정으로 패하고 만다.

10차 방어의 벽을 넘고 전설이 된 카오사이는 알베르토 카스트로를 홈으로 불러 10회 TKO로 제압한 후 9차 방어 상대였던 일본의 마츠무라의 재도전을 수락, 고베로 날아가 마지막 라운드에 작살을 내고 12차 방어까지 완료한다.

맹주에 자리에 오른 지 어느 듯 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카오사이의 철권통치는 멈출 줄 모른다. 여전히 살기등등한 기세로 주니어 밴텀급을 호령한다.

1990년 카오사이는 네 차례의 방어전을 치른다. 아리 블랑카를 자국으로 불러 5회에 패대기치고, 일본의 나카지마 순이치를 8회, 세계 챔피언을 지낸 한국의 김용강을 6회 그리고 미국의 신성 어네스트 포드 마져도 6회에 날려 보내며 16차 방어까지 마무리한다.

위대한 맹주 카오사이의 불꽃은 꺼질 줄 모른다. 1991년 4월 7일 한국의 자객 박재섭이 암살을 시도하지만 5회를 채우지 못하고, 같은 해 7월 20일 베네수엘라의 13전승(8KO) 무패의 자객 데이비드 그리먼도 약속이나 한 듯 5회에 나가떨어진다.

1991년 12월 21일, 위대한 맹주 카오사이는 멕시코의 터프가이 알만도 카스트로를 12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주니어 밴텀급 역사상 전대미문(前代未聞)의 19차 방어의 금자탑을 쌓는다.

19차 방어전이 끝나고 카오사이가 돌연 링에 오르기를 거부하며 은퇴를 선언한다. 세인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절대 권력자며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제국의 맹주가 무엇 때문에 강호를 떠나는지 그 깊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형제가 세계 챔피언에 등극하다(사진 블로그 조 타운슬리의 복싱매거진)
형제가 세계 챔피언에 등극하다(사진 블로그 조 타운슬리의 복싱매거진)

그의 검은 녹슬지 않았고 아직 33세의 한참 나이인데 돌연 은퇴를 선언했는지에 온갖 억측이 난무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적수가 없는데서 오는 공허함과 고독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광활한 말인가. 카오사이 갤럭시, 그는 그렇게 절대지존이 되어 있었다.

카오사이 갤럭시는 경량급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의 파워를 지닌 사우스포(왼손잡이)였다. 대개 사우스포는 들어오는 상대를 맞받아치는 카운트 중심으로 경기를 운영하지만 카오사이는 선제공격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해결사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방어에 허점이 많았지만 상대한 그 어떤 자객도 그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조지 포먼과 맥을 같이 하는 스타일의 선수였다. 하지만 포먼이 갖추지 못한 지칠 줄 모르는 스태미너와 태산과 같은 맷집이 있었다.

카오사이 갤럭시, 그가 위대한 또 하나의 이유는 추한 모습으로 마무리 하지 않고 ‘박수 칠 때 떠나는 용기’를 가졌다는 것이다. 비록 미국 본토에서는 당시 대한민국의 장정구와 달리 그의 체급에서는 일세를 풍미한 절대고수가 없었다 하여 평가절하 하지만 세인들은 잘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맹주인지를.

그가 떠나고 난 후 1999년, WBA 결정에 의해 카오사이 갤럭시의 이름이 위대한 전사들의 집합체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다.

“무에타이 보다 복싱이 훨씬 무서운 운동이다.” - 카오사이 갤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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