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치기’에서 ‘세계챔피언’까지…비운의 복서 김성준 ⑨
‘소매치기’에서 ‘세계챔피언’까지…비운의 복서 김성준 ⑨
  • 김갑상 기자
  • 승인 2018.05.0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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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2월 3일 저녁 10시 40분 서울시 중구 남대문의 어느 6층 빌딩 옥상, ‘야!’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한 남자가 투신한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모든 한(恨)을 토해 놓고 사라져간 장년의 남자는 바로 소매치기라는 어둠의 세계에서 빠져 나와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을 지낸 비운의 복서 김성준이었다.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직 살아가야 할 삶이 창창한데 어두운 허공 속으로 몸을 날린 것일까. 1978년 9월 30일 절대열세라는 세인들의 예상을 깨고 챔피언 태국의 강타자 ‘작은 탱크’ 네트로이 보라싱을 3회 KO로 날려버리고 소매치기라는 ‘검은손’에서 ‘영광의 손’으로 바뀌던 날 그는 간절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갑자기 영웅으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내 어두웠던 과거도 들추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감히 건방지지만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보라싱과의 혈전.
보라싱과의 혈전.

비운의 복서 김성준, 그가 살아온 삶은 한편의 드라마 그 자체였다.

김성준은 1953년 6월 3일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엔 남부러움 없이 성장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가세가 기울자 가정형편을 비관, 가출하여 거리를 떠돌기 시작한다.

배고픔과 추위는 그를 어둠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자신의 평생 ‘주홍글씨’로 남는 소매치기 세계로 발을 들인다. 손재주가 탁월한(?) 그는 한번 거리를 나서면 그때 당시엔 거금인 수십만 원식 가져 오고는 하였다.

나름 어둠의 세계에서 명성을 얻어 가고 있던 어느 날, 일상의 실력으로 지나가던 한 여자의 가방을 훔쳐 그 속을 살펴보니 하루 종일 시장바닥에 쪼그리고 않아 콩나물을 팔아 번 돈임을 직감한 그는 결국 길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그녀를 찾아가서 가방을 다시 돌려준다.

그 일이 있은 후 김성준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중 어느 날, 선배가 찾아 와 “너는 민첩성도 있고 동물적인 감각과 나름 주먹도 있는 것 같으니 복싱을 함 해봐라”고 권유한다. “세계챔피언이 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유명세도 탈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냐”며 입에 거품을 물며 떠벌린다.

김성준은 그 말에 마치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한줄기 빛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빛과 같이 일직선으로 달려간다.

당시 프로복싱은 유제두, 홍수환 선수가 쌍두마차가 되어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었다. 정치적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 하루하루 힘든 삶을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복싱은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1차 방어전 후 트로피를 받고 있는 김성준.
1차 방어전 후 트로피를 받고 있는 김성준.

어둠이 짙어가는 달동네 언덕에 홀로 앉아 성준은 혼자말로 되뇌인다. “그래 복싱에 미쳐보자. 죽어라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명성과 동시 지난 과오도 깨끗이 씻을 수 있다.”

강호에 발을 들인 김성준은 첫 시합부터 판정패로 시작한다. 1975년 한국 라이트 플라이급에 도전하기 전까지 10전 6승(3KO) 3패 1무승부로 노력에 비해 그저 그런 삼류 복서였다.

당시 김성준의 선배인 한국복싱의 살아있는 전설 홍수환은 그를 가리켜 “귀공자처럼 배우 뺨치게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 돈 많은 집 자식이 왜 복싱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오로지 복싱만이 자신을 구원 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김성준은 묵묵히 연습에만 전념 해 오던 어느 날 그에게 한국 타이틀 도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상대는 한국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문명안, 도전자 김성준은 특유의 맷집과 끈질김으로 10회 내내 챔피언을 몰아부처 10회 판정으로 타이틀을 획득한다.

한국챔피언 등극 후 그는 이기현과 리틀 박을 차례로 10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2차 방어에 성공한다. 비록 더딘 걸음이지만 김성준은 차곡차곡 자신의 꿈을 향해 한걸음 또 한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김성준의 이마에 각인된 ‘주홍글씨’가 그를 가로막는다. 자신은 모든 것을 잊었지만 여전히 어둠의 그림자는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1976년 새해를 맞아 전국적으로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소매치기 일제 단속’을 선포한다.

모든 정부기관을 동원 소매치기 일당을 압박하게 이른다. 그 와중에 김성준의 옛 친구 한명이 그의 집으로 찾아와 단속기간 만 숨어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친구를 숨겨오다 적발돼 둘은 나란히 구속되고 만다.

호남형인 김성준은 당시 여성팬이 많았다. 사진 주간스포츠
호남형인 김성준은 당시 여성팬이 많았다. 사진 주간스포츠

타이틀은 박탈되고 그는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만다. 지옥의 나락에서 겨우 빠져 나와 한국 챔피언에 올랐다가 또 다시 추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유치장 안에서 매일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 밖에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어느 날 그에게 자신의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김진세 검사가 유치장으로 찾아온다. “너 앞으로 손 씻고 복싱만 전념 할 수 있어?” 그때 김성준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쏟아진다. “검사님 복싱만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세계 챔피언이 되지 못하면 링 위에서 죽겠습니다.”

2개월 후 김성준은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김진세 검사는 그 후 김성준의 후원회장을 자처하고 포장마차까지 차려준다. 이에 김성준은 “검사님 이 은혜는 반드시 세계챔피언이 되어 보답하겠습니다.” 물론 이면에는 김성준의 석방을 위해 당시 최고의 복서였던 홍수환과 오영호의 노력도 있었다.

1976년 1월 25일 한차례 거센 풍랑 속을 헤치고 나온 김성준은 리틀 박과의 한국타이틀매치에서 판정으로 제압하고 체포되면서 박탈된 타이틀을 다시 손에 거며 쥔다. 이 날 전직 소매치기와 현직 검사는 링 위에서 서로를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환호한다.

챔피언을 되찾은 후 그는 김영환과 논타이틀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고 전에 대전한바 있는 이기현을 4회 KO로 제압하고 일단 숨고르기를 한다.

1977년 1월 리틀 박과의 재대결에서 10회 판정으로 1차 방어에 성공하고 일본 원정길에 오른다. 상대는 훗날 박찬희로부터 세계타이틀을 빼앗아 간 오쿠마 쇼지. 결과는 10회 판정패.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난타전의 제왕 김막동과의 혈투 끝에 2차 방어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또 다시 일본원정길에 올라 덴류 가즈노리와의 시합에서 판정으로 패한다. 1977년 12월 28일까지 김성준은 1번의 무승부와 3번의 승리를 수확한다. 3번의 승리 중 2번은 KO승이었다.

챔프에 오른 후 환호하는 김성준. 사진 주간스포츠
챔프에 오른 후 환호하는 김성준. 사진 주간스포츠

1978년 1월 29일 김성준은 동양태평양(OPBF) 타이틀에 도전한다. 상대는 기교파 정상일이였다. 12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판정으로 동양 정상의 자리에 오른다. 1차 방어 상대는 지난 해 일본원정에서 선전하고도 텃세 판정으로 패한 덴류 가즈노리를 서울로 불러 들여 3회에 요절을 내고 1차 방어에 성공한다.

1978년 7월 9일 김성준은 세계타이틀 도전 전초전 겸 동양태평양 타이틀 방어전을 전 챔피언 정상일과 격돌한다. 혈투, 그 자체였다. 양자는 시종일관 펀치를 내밀고 얼굴은 성한데 하나 없는 한마디로 처절한 결투였다. 결과는 김성준의 12회 판정패였다.

세계도전의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김성준은 절망한다. 그런데 다음날 어찌된 일인지 챔피언 보라싱이 도전자는 김성준이라고 발표한다. 보라싱이 보기엔 정상일 보다 김성준이 더 편한 상대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김성준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천재일우의 기회가 온 것이다.

김성준의 스타일은 느린 발에 테크닉이 뛰어 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일발필살의 강타자도 아니다. 어찌 보면 복싱에는 재능이 없는 쪽으로 분류되는 선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에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맷집 그리고 악바리 근성이 있었다.

은퇴 할 때까지 통산전적에 14패를 안고 있었지만 단 한차례의 다운도 허용하지 않은 태산과 같은 굳건함을 가지고 있었다. 예로 김성준과 대전한 상대치고 시합 후 라커룸에서 피똥을 싸지 않은 선수가 없다고 한다.

경기 내내 우직하게 끊임없이 복부를 공격한다. 처음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라운드가 거듭할수록 호흡이 곤란해지고 다리가 풀리기 시작할 쯤 김성준이 자랑하는 레프트에 이은 라이트 어퍼컷이 날아오면 제아무리 장사라도 주저앉고 만다.

1978년 8월 9일 서울문화체육관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타이틀 매치, 당시 챔피언 태국의 네트로이 보라싱이 23전 19승(9KO) 3패 1무, 도전자 김성준이 29전 19승(9KO) 6패 4무의 전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비운의 챔피언 김성준.
비운의 챔피언 김성준.

절대열세라는 예상 속에 운명의 시작 공이 울린다. 전문가들이 예측한데로 1회와 2회는 보라싱의 독무대였다. 도전자를 로프에 밀어붙이고 쉴 세 없이 펀치를 날린다. 간혹 도전자의 반격이 있었지만 챔피언 보라싱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중계석에선 로프를 빠져 나와야 된다고 비명을 지른다.

운명의 3회, 두 선수는 마치 재방송을 보듯 똑 같은 패턴으로 로프에 기대 난타전을 전개한다. 종료 1분을 남기고 로프를 등지고 있던 김성준이 순식간에 빠져 나와 챔피언을 난타한다. 그리고 레프트 훅에 이은 라이트 어퍼컷이 챔피언의 복부에 명중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김기수, 홍수환, 유제두, 염동균에 이은 다섯 번째 세계챔피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후원회장이기도 한 김진세 검사와의 세계챔피언이 되겠다는 약속을 그는 불과 1년 8개월 만에 실현한 것이었다. 둘은 링 바닥에 앉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당시 민초는 정치적 독재에 진절머리를 치는 반면 다른 독재를 갈망하고 있었다. 역대 우리나라 세계챔피언 치고 3차 방어에 성공한 선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성준이 오래토록 왕좌에 있어 주길 원했다.

1차 방어전을 헥토르 멜린데스와 고전 끝에 무승부로 방어하고 시오니 카루포를 서울로 불러 들여 15회 판정으로 2차 방어에 성공한다.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3차 방어 상대는 1차 방어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헥토르 멜린데스였다.

1979년 10월 21일 그날 TV 앞에서 중계방송을 보던 국민 대다수가 거의 숨이 다 넘어갔다. 그만큼 애간장을 태우는 시합이었다. 실제 중계를 보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결과는 15회 챔피언의 판정승.

그 다음해 정월 초 김성준은 4차 방어를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다. 상대는 나카지마 시게오. 경기 초반 김성준은 도전자의 무수한 연타를 허용하고 얼굴은 피범벅이 된다. 그날 도전자는 주먹이 세 개였다.

두 개의 주먹과 제3의 주먹 머리가 있었다. 노골적인 퍼팅인데도 주심은 모른 척 계속 경기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핏빛으로 물든 얼굴 속에 섬뜩하게 반짝이는 김성준의 눈동자를 보며 민초들은 아직 시합은 끝이 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중반 이후 챔피언은 도전자를 세차게 몰아 부치지만 결과는 도전자의 15회 판정승이었다. 무관이 된 김성준은 그해 여름 일본의 오쿠마 쇼지에게 한 체급을 올려 세계도전에 나서지만 판정으로 패하고 만다.

김성준에게 어둠이 짙어 오고 있었다. 15개월 간 맹주에 올라 대한민국 최초로 3차 방어에 성공했지만 거기 까지가 한계였다. 이 후 몇 차례 경기를 했지만 3승 5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1982년 소매치기에서 세계챔피언으로 오른 전설을 뒤로 하고 은퇴를 선언한다.

링을 떠난 후 그는 이민, 사업 등 여러 가지에 손을 대보지만 사기와 이혼 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링 위에서는 단 한 번도 주저앉은 적이 없는 그였지만 사회생활은 사각의 링 보다 더 참혹한 곳이었다.

결국 그는 약혼자와 결별한 후 빌딩에 올라 세상을 향해 온 몸을 던짐으로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36세였다. 당시 그의 점퍼 주머니에 있는 명함 뒷면에 짤막하게 이렇게 쓰여 있었다.

“보잘 것 없고 못 배운 놈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오직 나는 마지막 사랑을 나의 목숨보다 사랑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태어나 배고픔과 추위에 떨며 어두운 시대를 살던 모든 군상 중 범죄의 소굴을 빠져 나와 오로지 두 주먹만 믿고 자신의 힘으로 앞날을 개척한 비운의 복서 김성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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