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신화(神話)’ 김신락(金信洛)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신화(神話)’ 김신락(金信洛)
  • 김갑상 기자
  • 승인 2018.03.2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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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열전(在日同胞 列傳) ➌

1924년 함경남도 홍원군 신풍리 출생
헤롤드 사카타, 김신락에 레슬링 권유
박치기왕 김일 일본으로 건너가 김신락 제자되다

‘김신락(金信洛).’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가 일본 스모(相撲)계에서 세키와케(関脇)까지 승급하였으며 전 일본 레슬링협회를 창립하고 본인 스스로 세계챔피언에 올라 일본 전역을 레슬링 신드롬을 일으킨 그는 우리나라에선 역도산(力道山)으로 잘 알려져 있다.


2차 대전 패전으로 상실감에 빠져 있던 일본은 ‘역도산’이 거구의 백인을 당수로 쓰러뜨리는 장면을 보며 짜릿한 희열감을 느꼈으며 그 에너지는 국가재건에 활력소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론 역도산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존경으로 확대되어 그 당시 ‘덴노(天皇) 다음으로 역도산이다’ 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었다.

세계 챔피언에 오른 김신락.
세계 챔피언에 오른 김신락.

 김신락은 1924년 11월 14일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홍원군 신풍리에서 직업이 지관인 아버지 김석태와 어머니 전기(田器) 사이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골격을 닮아 김신락은 위의 두 형 항락, 공락과 더불어 힘이 천하장사였다.

1940년 일본인 형사 오카다 켄이치가 홍원군에서 벌어진 씨름시합에서 김신락의 실력을 보고 감탄, 그를 일본으로 데리고 와서 동경에 있는 스모 도장 니시요노 베야(二所ノ関部屋)에 소개한다.

당시 도장의 관장(오야카다·親方)은 조선인이 국기인 스모를 한다는 것은 꺼림칙하니 일본여자와 혼인시켜 개명을 하는 것이 좋겠다며 게이샤 출신 오자와 후미코(小沢史子)와 맺어 주고 나가사키 모모타 가문의 양자로 들여 이름을 나가사키현 오오무라(長崎県 大村市) 출신 모모타 미츠히로(百田光浩)로 개명한다.

우여곡절 끝에 입문한 김신락에게 관장은 스모 예명을 역도산으로 이름 붙여 준다. ‘역도산’(리키도우잔) 위대한 신화의 시작이었다. 한국 씨름 기본기와 타고 난 힘으로 일본으로 건너 온 그해 5월에 역사(力士)가 된 후 6년 뒤 꿈에 그리던 마쿠우찌(幕内)에 진입한다.

마쿠우찌는 야구로 치면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에 진입한 셈이었다. 1947년 6월 김신락은 마쿠우찌 두 번째 시합에서 9승 1패의 성적으로 3명이 동률이 되어 우승 결정전에 나섰지만 지존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 하지만 수훈상을 수상하면서 일본전역에 ‘역도산’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주었다.

1949년 5월 김신락은 세키와케(関脇)로 승진한다. 일본 스모는 최고위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주요 계급은 요코즈나(橫綱), 오오제키(大關), 세키와케(關脇), 고무스비(小結), 마에가시라(前頭)가 있다. 마에가시라는 다시 1등급부터 10등급으로 나누어진다.

승승장구하던 김신락이 1950년 9월에 돌연, 스스로 스모선수의 상징인 상투를 자르고 폐업을 선언한다. 이유는 민족차별이었다. 자신의 실력을 충분이 입증했음에도 불구 오오제키 승진이 되지 않는다며 은퇴를 선언한다. 그의 스모 생애통산 성적은 135승 82패, 마쿠우찌 75승 54패라는 기록을 남긴다.

전성기의 김신락.
전성기의 김신락.

스모 은퇴 후 그는 자신의 도장 후원회장이였던 닛다 신죠(新田新作)의 건설사 닛다건설(新田建設) 자재부장으로 들어가서 근무하다 우연히 나이트클럽에 술을 마시러 갔다 시비가 붙어 멱살잡이를 했는데 바로 그 상대가 일본계 미국인 하와이 출신 전 프로레슬러 헤롤드 사카타였다.

서로의 완력에 감탄한 그들은 의기투합한다. 사카다는 김신락에게 프로레슬링 입문을 권유한다. 김신락은 망설임 없이 미국 호놀룰루로 날아간다. 그때가 1952년 2월의 일이었다. 김신락은 레슬러로 변신하기 위해 맹훈을 거듭한다.

다음 해 그는 일본으로 귀국해 스모선수시절 후원회장 이었던 닛다 신죠(新田新作)와 손을 잡고 프로모터 나가다 마사오(永田貞雄)를 영입, 전 일본 프로레슬링협회를 창립한다. 그 후 미국 프로레슬러 사프를 형제를 초청, 일본 전역을 순회하며 14회 걸쳐 시합을 연다.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1953년 각 방송국은 레슬링 경기를 앞 다투어 생중계하면서 김신락은 전 국민의 지원을 등에 업고 큰 붐을 일으킨다.

어떻게 지핀 불씨던가. 김신락은 자신의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본 역사상 최강의 유도선수 기무라 마사히코(木村政彦)를 코치로 영입, 유도 기술을 레슬링에 적합한 신기술로 개발하는 한편 가라데 기술인 당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서양인에 대한 패배감과 좌절감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은 김신락이 거구의 백인을 두들겨 패는 장면을 보며 열광했다. 시간이 갈수록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김신락은 당시 누가 뭐래도 일본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 하면 박치기 왕 김 일이 밀항선을 탔다가 체포되어 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옥중에서 “프로레슬러가 되고 싶습니다”라는 편지를 주소를 몰라 ‘일본국 역도산’ 하고 보냈는데 그 편지는 무사히 도착했고 그 후 김 일은 석방된 뒤 김신락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하니 그의 유명세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예라 할 수 있었다.

승승장구 하던 김신락은 코치겸 동업자였던 기무라 마사히코와 결별한다. 기무라는 김신락과와는 별도로 레슬링협회를 창립, 시합을 열어 보지만 흥행에 실패하면서 금전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자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역도산의 경기는 전부 쇼다. 진검승부로 하면 내가 절대 질 수 없다”라며 도전의 의지를 표명, 김신락을 자극한다.

설경구 주연 영화 '역도산'
설경구 주연 영화 '역도산'

이는 얼마 후 쇼와의 간류지마(昭和の巌流島·일본의 유명 검객인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가 대결을 펼친 장소, 그만한 대승부를 칭하는 말)라고 불리는 대혈투의 서막이었다.

1954년 12월 22일, 김신락은 기무라의 노골적인 도전에 대해 일본헤비급 타이틀을 걸고 맞짱을 뜨자며 흔쾌히 도전에 응한다. 그의 발언에 일본은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인다. “과연 유도가 이길 것인가. 아니면 스모가 이길 것인가.” 흥행은 시작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사실 이 시합은 기무라측 증언에 따르면 동경을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첫 시합은 무승부, 다음부터는 장소를 옮겨가며 양자가 이겼다 졌다는 반복하기로 하였으나 첫 단추부터 엉망이 되고 만다.

경기 시작과 동시 기무라의 킥이 김신락의 급소에 명중하자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흥분한 김신락은 프로레슬링 기술은 뒷전이고 손과 발길질로 무자비한 구타를 시작한다. 사각의 캔버스는 선혈로 낭자했다.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던 관중들도 경악을 금치 못한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기무라가 두 손을 들며 김신락의 KO승으로 승부에 종지부를 찍는다. 쇼와의 간류지마는 이렇게 끝이 난다. 사건 이후 기무라는 “역도산이 돈과 명예에 눈이 멀어 나를 배신했다”며 시합 시나리오를 폭로했다.

하지만 언론은 스모출신인 역도산이 천하를 제패했다며 대서특필하자 각지로부터 프로레슬링 지망자가 속출하였다. 그 중에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등 수 많은 선수들이 김신락의 제자로 입문한다.

1955년, 김신락은 킹 귱크를 제압하고 아시아 헤비급챔피언을 획득한다. 1958년 루 데즈를 물리치고 인터네셔널 왕좌에 오른다. 1959년에는 제1회 월드 리그를 개최 우승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63년까지 연속으로 우승하며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1962년 프레드 부라시에 NAWA세계왕좌에 도전 타이틀을 탈취하였지만 협회에서 크래임을 제기 보류되었다. 이 후 그는 WWA초대 헤비급 챔피언으로 승인되었다.

1963년 1월, 김신락은 한국체육협회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김포공항에는 체육관계자 그리고 레슬링협회 등 약 60여 명에 마중 나왔다. 김신락은 기자회견에서 “20년 만에 모국을 방문하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다”며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김신락의 묘소가 있는 이케가미혼몬지(池上本門寺). 사진출처 블로그 천고마비
김신락의 묘소가 있는 이케가미혼몬지(池上本門寺). 사진출처 블로그 천고마비

1963년 5월, 동경체육관에서 벌어진 WWA세계챔피언 타이틀전은 평균시청률 64% 기록, 이것은 현재까지 역대시청률 4위에 랭크되어 있다.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김신락의 최후는 너무나 어이없게 마감한다. 1963년 12월 8일 오후 10시 30분께 아카사카(赤坂)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다 야쿠자 스미요시 일가(住吉一家)의 하부 조직원인 무라타 카츠시(村田勝志)와 발을 밟았다는 시비가 붙어 김신락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맞은 무라타가 등산용 칼을 뽑아 복부를 찔렸다.

싸움이 멈춘 후 스스로 배를 움켜지고 경찰이나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알고 지내던 의사에게 가서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치료 후 음식을 삼가야 함에도 불구 폭음과 폭식으로 상태가 나빠져 두 번째 수술을 하고 난 후 의사는 절대 완치 될 때까지 금식을 신신당부했지만 이를 듣지 않고 또 다시 폭음과 폭식으로 인해 복약염으로 사망한다.

그때기 사건 일주일 뒤인 12월 15일 오후 9시 50분께 였다. 어쩌면 그가 살아 온 삶에 비해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었다.

김신락의 죽음 이후 수 많은 의혹이 제기됐다. 혹자는 마취의의 실수로 죽었다고 하기도 했고 또 다른 쪽은 그가 정계에 진출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우익 쪽에서 계획적으로 살해했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사망 후에도 김신락의 인기는 여전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에 가까운 수준의 추모 인파와 함께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이후 팬들은 “역도산 사망 원인을 규명하라”며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가 떠난 후 일본 프로레슬링협회는 사상누각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만큼 그의 존재는 켰다.

김신락은 일본 프로레슬링계에 대부였다. 그런 그는 일본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숨겼다. 그의 제자 김 일의 회고록에도 자신을 지도 할 때나 사석에서도 한국말을 쓰지 않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먹는 것에 대해선 어쩔 수 없었던지 평소 불고기와 마늘을 가장 좋아 했으며 친구가 운영하는 불고기집에 남들 모르게 밤늦게 찾아가 불고기에 마늘과 소주를 양껏 마시길 자주 했다고 한다.

또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장훈과도 친했으며 비시즌 일 때에는 자신의 체육관으로 불러 체력을 키우는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김신락의 묘비.
김신락의 묘비.

김신락은 세 번의 결혼으로 3남매를 두었다. 15세에 결혼한 북에 두고 온 부인 박신봉 사이 딸 영숙이 있다. 그의 딸은 훗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북한 역도대표팀 감독으로 방한하였다.

두 번째 부인 오자와 후미코 사이 요시히로(義浩)와 미츠오(光雄) 형제를 두었다. 훗날 후미코는 이혼 전까지 친자식과 그 자신도 김신락으로부터 가정폭력을 받았다고 증언해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다나카 게이코(田中佳子)는 스튜디어스 출신의 세 번째 부인이다. 결혼 후 채 1년도 되지 않아 미망인이 되었다.

이제는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된 김신락, 그가 떠난 이후 한국 북한 일본에서 그의 소재로 만화 영화 드라마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제작되었다. 1960~70년대를 살아 온 이 땅의 사람들이라면 김신락은 몰라도 역도산은 지나가던 꼬마에게 물어도 알 정도로 그는 일본뿐만 아니라 남북 한반도 전체 국민들에게도 자랑이었다.

그래서 불혹(不惑)이 채 되기 전 불귀의 객이 된 그를 팬들은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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