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성공신화’ MK택시 창업자 유봉식
‘재일동포 성공신화’ MK택시 창업자 유봉식
  • 김갑상 기자
  • 승인 2018.01.12 15: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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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열전(在日同胞 列傳) ➋

-1995년 미국 타임지 선정 ‘세계 최고의 서비스 기업’
-열여섯 나이 현해탄 건너…32세 미나미(南)택시 창업
-노무현정부 국위선양 공로인정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여

“하늘에는 파일럿이 있다면 땅에는 택시가 있다. 파일럿 수준의 월급은 못주겠지만 은행 지점장 수준의 월급은 줄 수 있다. 나는 여기에 계신 여러 기사분들께 반드시 이 약속은 지키겠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약속은 지켜졌다.


노조와 대화하고 있는 유봉식 대표.
노조와 대화하고 있는 유봉식 대표.

열여섯 살의 어린나이에 현해탄 넘어 일본에 건너가 맨주먹으로 시작해 세계최고의 서비스기업을 만든 이가 있다. 그가 바로 MK택시 창업주 유봉식이다. 일본명은 아오키 사다오(青木 定雄)다.

1928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유봉식은 1943년 열여섯이 되던 해 현해탄 넘어 일본의 교토(京都)에 정착한 그는 리츠메이칸 고등학교(立命館高等学校)를 졸업 한 후 리츠메이칸 대학 법학부( 立命館大学法学部)에 다니던 도중 학업을 중단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1956년 그가 28세가 되던 해 자신이 근무하고 있던 나가이석유(永井石油)가 도산하자 아름아름 모아둔 돈으로 회사를 인수해 주유소 사업을 시작한다. 그가 써내려 간 성공신화의 시작이었다.

나가이석유를 인수한 후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갈 쯤 유봉식은 택시업계로 눈을 돌린다. 한번 마음먹으면 행동도 빠른 그는 1960년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해 미나미(南)택시 주식회사를 창업한다. 첫 영업 출발 전 그는 눈발이 휘날리는 회사 차고지에서 얼마 되지 않는 전 직원을 불러 놓고 꼭 지켜야 할 영업방침을 알려준다.


첫째, 우리 회사는 장애인 우선 탑승 원칙을 지킨다.

둘째, 손님이 승차 시 항상 내려서 문을 열어주고 “어서 오십시오” 하고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 하차 시에는 “놓고 내린 물건은 없습니까” 하고 주의를 일깨울 것. 그리고 깜박하고 인사를 하지 않은 손님께는 요금을 받지 말 것.

셋째, 회사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따라서 회사 발전을 위해 기사 여러분들의 좋은 의견은 반드시 회사경영 정책에 반영하겠다.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은 경영자인 내가 할 일이다.


그렇게 자동차 10대로 시작한 작은 사업이었지만 그에게는 원대한 꿈의 시작이었다. 당시 유봉식의 영업방침은 교토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좋은 이미지는 곧바로 매출로 연결되었고 회사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갔다.

MK택시는 요금을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MK택시는 요금을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1977년 유봉식이 49세가 되던 해 경영난으로 휘청이던 카츠라(桂)택시를 인수·합병하면서 미나미택시와 카츠라택시의 앞글자를 따 지금의 MK택시 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꾼다. 이때부터 그는 사원들의 복지에 눈을 돌려 먼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사원들의 사택 근무체제 도입을 통한 주거문제를 해결한다.

승승장구 하던 유봉식은 1970년대 후반 오일쇼크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시민들이 비싼 택시요금에 부담을 느껴 눈에 띄게 손님이 줄어들자 택시업계의 반발을 무릎 쓰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동일지역 동일요금을 받는 관행을 깨기 위해 소송을 제기, 1985년 오사카(大阪) 지방재판소에서 승소하며 규제 완화를 이끌어 낸다.

무려 7년간의 긴 법정투쟁이었다. 그의 승리는 수많은 시민들의 아낌없는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재판의 승자는 고스란히 시민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자율요금제가 되면서 MK택시가 먼저 요금을 대폭 인하했기 때문에 다른 업계도 요금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친절의 대명사 MK택시.
친절의 대명사 MK택시.

유봉식은 경영에 전념하면서 자식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언젠가 자신도 때가 되면 물러서야 했기에 엄격하게 훈육했다. 예를 들면 세 아들 중 막내에게 집에서 잠만 재우고 회사로 불러 들여 온갖 굳은 일을 시키며 밑바닥부터 체험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화장실 청소까지 시켰다. 여기에서 노사 간 분배정의가 이루어지고 인간적인 신뢰도 두터워졌다. 하지만 그에게도 노사분규의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괴로움을 참고 믿음과 애정으로 분규의 불씨를 잡았다.

언제나 이용자와 종업원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한 경영전략이었다. 또 그는 시간이 허용되면 본인이 직접 택시를 몰고 나가 고객들과 현장에서 직접 목소리를 들어 영업정책에 반영하기도 했다. 세 아들 역시 수시로 택시를 끌고 나가 현장 체험을 시켰다.

저자 나카무라 겐이치의 '안녕하세요 MK택시 유봉식입니다'.
저자 나카무라 겐이치의 '안녕하세요 MK택시 유봉식입니다'.

1994년 유봉식이 66세가 되던 해 대표이사를 사임하고 세 아들 신명, 정명, 의명에게 경영권을 물려준다. 2001년에는 일본 내 동포를 위한 금융기관 긴키(近畿)산업신용조합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지금은 교토, 도쿄, 오사카, 고베, 나고야를 중심으로 약 2000여대의 택시를 운행하고 있고 10여개의 계열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또 1995년에는 미국 타임지선정 서비스부분 세계 1위의 기업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2004년 유봉식은 노무현 정부시절 국위선양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 온 유봉식은 2017년 6월 8일 만성질환인 흡인성 폐렴으로 8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이 후 엠케이 그룹은 장남 신명(노부아키)이 최고경영자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인이 의지를 모을 수 있다면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있다.”
-2005년 어느 잡지사의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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