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살다간 파이터 김득구 ②
불꽃처럼 살다간 파이터 김득구 ②
  • 뉴스아이거제
  • 승인 2017.11.2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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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타전을 전개하는 김득구와 맨시니
난타전을 전개하는 김득구와 맨시니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 마을 뒤편 야트막한 구릉에 잡풀이 우거진 그곳에 자그마한 무덤이 있다. 무덤 우측에 묘비가 서 있다. 묘비 뒷면에 이렇게 적혀 있다.

‘1956년 8월 10일 출생. 본명은 이덕구, 어머니가 김호열씨와 재혼. 김호열씨 호적에 1967년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 1982년 이영미씨와 약혼하고 1983년 유복자 김지완 출생, 1982년 11월 14일 세계라이트급 도전. 동년 11월 18일 미합중국 라스베이가스 대저투스프링 주립병원에서 사망’

초라한 그 무덤의 주인은 바로 불꽃처럼 살다간 복서 김득구였다.

비록 그는 세계제패 목전에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무명의 복서가 전 세계 복싱팬들의 가슴속에 투혼이라는 단어를 아로새겨 주고 불꽃처럼 장렬하게 산화해 갔다.

김득구의 출생지는 강원도 고성이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전라북도 군산으로 이사 후 개명을 했다는 것이 정확한 것 같다. 호적상 김득구는 1955년 1월 8일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김득구의 묘지와 표지판.  사진 강원일보
김득구의 묘지와 표지판. 사진 강원일보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윈 후 어머니가 재혼하자 이복형제들과의 불화 등으로 그 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다 14살 어린나이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다. 그 때가 1972년 초여름의 일이었다.

상경 후 그는 살아남기 위해 신문배달, 구두닦이, 중국집 배달원, 볼펜장수 등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불연 듯 이런 식의 삶을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해 늦은 공부를 시작한다. 특유의 뚝심으로 주경야독한 결과 그는 검정고시에 합격해 천호상고로 진학한다.

타고난 성실함과 악착으로 노력하는 자 만이 미래를 준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중 우연히 한 장의 포스터를 보게 된다. “권투관원 모집, 꿈이 있는 자여 오라.” 그곳에서 김득구의 인생은 외길로 달려간다.

당시 한국 프로복싱은 동아체육관 그리고 극동프로모션이 양대 산맥을 이루며 국내 프로복싱 시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김득구는 양대 산맥중 하나인 김현치씨가 관장으로 있는 동아체육관에 입문하게 된다.

그 곳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박종팔, 황준석, 유명우, 이승훈, 김환진 선수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김득구는 그 중 맏형인 김환진(전 WBA주니어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을 많이 의지하고 따랐다.

그는 천재성을 지닌 복서는 아니었다. 타고난 성실함과 의지로 자신의 단점을 하나 둘씩 극복해 간다. 3년간의 아마추어 선수생활을 거쳐 1978년 박명수 선수를 4회 판정으로 꺾고 본격적인 프로선수의 길로 들어선다.

김득구의 체중계를 바라보는 맨시니
김득구의 체중계를 바라보는 맨시니

1980년 12월,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제압하고 한국챔피언 타이틀 획득과 동시 OPBF 동양챔피언 도전권을 손에 넣는다. 김득구가 복싱팬들의 가슴속에 이름을 각인시킨 시합이 바로 당시 동양챔피언 ‘탱크’ 김광민과의 경기였다.

‘탱크’라는 별명답게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김광민을 상대로 철저하게 아웃복싱으로 일관, 치고 빠지는 전법으로 착실하게 포인트를 획득, 절대 열세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승리하게 된다. 이후 그는 두 차례의 방어전을 치르고 꿈에 그리던 라이트급 세계챔피언 도전 자격을 얻는다.

상대는 백인의 희망 WBA라이트급 세계챔피언 미국의 레이 맨시니. 프로통산 알렉시스 아르게요에게 유일한 1패를 안고 있었다. 맨시니는 저돌적인 인파이터로 천부적인 재능과 펀치력을 겸비한 약관의 기재였다.

어떻게 손에 넣은 기회인가. 이때부터 그는 강도 높은 트레이닝에 들어간다. 그 정도가 심하다 보니 주변에서 걱정 어린 조언에 “관을 준비해 놓고 가겠다. 만일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며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맨시니의 라이트, 상대를 응시하는 김득구
맨시니의 라이트, 상대를 응시하는 김득구

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가스 시저스팰리스 호텔 특설링, WBA라이트급 세계타이틀매치. 당시 챔피언 맨시니는 24승(19KO) 1패, 도전자 김득구가 17승(8KO) 1무 1패의 전적이었다. 당시 도박사들은 9:1 혹은 8:2로 맨시니의 압도적인 우세를 예상했다.

체력과 패기의 맨시니, 임전무퇴의 정신력으로 무장한 김득구. 운명의 1회전의 공이 울리자 양자는 성난 맹수처럼 링 중앙에서 난타전을 전개한다. 두 선수의 혈투에 운집한 8천 여 명의 관중들은 열광한다.

맨시니 전매특기인 좌우 훅으로 공격하자 김득구는 라이트 잽에 이은 레프트 스트레이트로 맞받아친다. 맨시니의 초반 KO승으로 싱겁게 끝나리라는 예상과 달리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오히려 김득구가 맹렬하게 밀어 붙인다.

의외로 강하게 치고 나오는 김득구의 투혼에 맨시니뿐만 아니라 관중들도 술렁이기 시작한다. 9회까지 양자는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주먹을 주고받는다. ‘혈투’ 그 자체였다. 이때까지 포인트 면에서 김득구의 우세가 뚜렷해 보였다.

10회, 챔피언 맨시니가 승기를 잡는다. 김득구가 리처드 그린 주심으로부터 어이없는 버팅파울 선언을 받고 주춤하는 사이 맨시니는 김득구를 로프에 밀어부치고 사정없는 좌우연타로 그로기 상태로까지 몰아넣는다. 다행히 종료 공이 울려 위기를 모면한다.

11회 김득구는 초반에 체력소비를 많이 한 탓인지 다리 힘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자 곧바로 돌진해 들어간다. 맨시니가 찰나의 순간 라이트 훅을 김득구의 턱에 적중시킨다. 살짝 무릎을 꿇었지만 주심이 보지 못해 다운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눈빛에서 김득구의 투혼을 볼 수 있다
눈빛에서 김득구의 투혼을 볼 수 있다

이때부터 김득구에겐 오로지 정신력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지치지 않는 체력을 자랑하는 맨시니는 12, 13회에도 김득구의 얼굴과 몸통을 난타한다. 김득구도 투혼을 발휘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친다.

운명의 14회에서 모든 것이 끝난다. 공 소리와 동시 뛰어나오면서 선제공격을 강행한 것이 화근이었다. 맨시니의 좌우 훅 카운트를 맞고 뒤로 물러서는 김득구를 향해 맨시니의 통렬한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꽂힌다. 김득구가 그대로 캔버스에 쓰러진다.

몸은 만신창이지만 로프를 잡고 전방을 응시하는 눈빛에선 자신을 일어서라고 명령한다. 전 국민이 생중계로 그 장면을 지켜보며 하나 같이 안타까움 마음으로 “득구야 할 만큼 했다. 제발 일어나지 마라”고 부르짖는다.

그래도 그는 두 팔로 로프를 당기며 안간힘을 다한다. 그 순간 주심의 게임종료 선언과 함께 고목이 쓰러지듯 내려앉는다. 14회 19초만의 일이었다. 그가 약속한 것처럼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는 말이 슬프게도 현실이 되어 버렸다.

마의 14회, 끝내 산화한 김득구
마의 14회, 끝내 산화한 김득구

뇌사 상태에 빠진지 4일 후 그는 치열하게 살았던 삶의 터전, 사랑했던 모든 이들을 뒤로 하고 그렇게 떠나갔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 이었다. 그의 죽음 후 세계 복싱계는 거센 논쟁이 인다.

뉴욕타임즈를 비릇한 언론에서 복싱의 잔혹성을 지적하였고 미국 하원에서는 이 문제로 인해 청문회까지 열렸다. 결국 세계복싱 양대 기구는 경기를 15회에서 12회로 줄이고 스텐딩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한다.

맨시니와 김득구의 시합 후 많은 후유증을 양산한다. 당시 주심을 맡은 리처드 그린이 의문의 자살을 하고 김득구의 어머니 양선녀씨도 “가난이 내 아들을 죽였다”며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만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굴하지 않았고 가난이라는 천형에 맞서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 했던 그 시대의 삶을 살아 간 모든 이들의 자화상이다.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당시 약혼자 이영미씨의 뱃속에 3개월 된 아기가 치대 졸업 후 치과의사가 되어 있다.

불꽃의 파이터 김득구, 그는 그때 그 시대에 우리가 살아온 삶의 아픈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너무나 슬픈 이름이다.

“故 김득구 선수는 戰士였고, 챔피언의 마음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 레이 맨시니
“나에게는 최후까지 싸울 용기와 의지가 있노라.” - 김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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