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이야기] ‘불굴의 화신’ 주영포 하청농협장을 만나다
[거제이야기] ‘불굴의 화신’ 주영포 하청농협장을 만나다
  • 김갑상 기자
  • 승인 2019.03.25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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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장 출마는 내 인생의 중간평가
IMF의 충격파로 한차례 자살시도도
조합장은 조합원들을 위해 한 사람의 봉사인일 뿐

두 번째 치러지는 전국 조합장동시선거가 끝난 후 지난 19일 당시는 당선자 신분(이하 조합장)이었던 주영포(58세)씨를 봄볕이 따사로운 오후, 한적하고 전망이 수려한 하청 칠천도 다리 입구 인근에 위치한 찻집에서 만났다.

건장하고 큰 키에 말쑥하게 차려 입은 양복과는 반대로 검게 탄 얼굴과 필자의 손을 잡고 있는 투박한 손에서 은행원 보다는 농사꾼에 더 가까워 보이는 소박함이 먼저 가슴에 와 닿았다.

커피를 시켜 놓고 그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번에 계약이 끝나는 거제 백병원 장례식장 계약연장을 해야 하는데….” 하며 당선자의 여유보다는 산적한 앞으로의 일들을 먼저 걱정했다.

주영포 하청농협 조합장.
주영포 하청농협 조합장.

그렇게 말문을 턴 주 조합장은 먼저 부족한 자신을 62.56%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준 조합원들에게 감사드리고 내가 나고 자란 내 고향 하청농협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하겠다는 다짐과 기쁘기보다 중책에 마음이 무겁다며 먼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 간 자신의 인생사를 담담하게 풀어 나갔다.

 “흙과 더불어 살자” 마지막엔 ‘봉사자’의 길 다짐

주 조합장은 1961년 3월 31일 하청면 유계리에서 태어나 하청초, 하청중, 거제종고(현 경남산업고)를 거쳐 진주농림전문대학(현 경남과학기술대학) 원예과를 졸업한 후 농협에 투신한다.

동부농협에 4년여를 근무하다 하청농협으로 자리를 옮겨 30년 6개월 동안 청춘을 하청농협에 받쳤다.

초임시절 잠시 농협을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도 했지만 그는 내 고향에서 지역 어른들을 모시고 가족과 함께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좋았고 마지막에는 봉사자의 길로 마무리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주 조합장은 자신은 일복이 많아 남들이 기피하는 일들을 도맡아 왔다고 자부했다. 하청농협으로 온 후 유자, 치자를 싣고 부산공판장을 누비고 다녔고 죽순, 복숭아 통조림을 군부대에 납품하기 위해 휴일도 없이 현장에서 뒹굴며 살아 왔다.

30년 청춘을 하청농협과 함께 한 주 조합장.
30년 청춘을 하청농협과 함께 한 주 조합장.

그 시절에는 시간외 수당은 언감생심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일이 좋아 일에 미쳐 살아 왔고 농민들을 위해 한 개라도 더 팔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녔다. 일에 미쳐 동분서주하던 그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온다. 위기의 실체는 1997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IMF 외환위기였다.

당시 직장인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지인에게 선 연대보증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친동생이 당시로는 엄청 난 거금이었던 5억 여 원을 부도내고 야반도주를 하였던 것이었다.

불행의 파도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

이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빠졌다. 불행이라는 파도는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했던가. 경제적인 궁핍함은 아내마저 자신을 버리고 떠난다. 그는 하늘을 원망했다. 방구석에 앉아 절망의 나날들을 보냈다. 방법이 없었다.

삶의 의욕마저 상실한 그는 직장에 사표를 내던지고 소주 다섯 병을 들고 함안 산골로 들어가 자살을 기도하지만 다행이 지나가던 행인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틀 후에 깨어난 그에게 한사람이 찾아온다. 그가 평생에 두 명의 은인이 있다고 한다. 그중 한사람인 당시 직장 상사였던 윤병길 씨였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봉투하나를 툭 던진다. 그가 제출한 사표였다.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다 잠시 눈을 감은 주 조합장.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다 잠시 눈을 감은 주 조합장.

아직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윤병길 씨는 직장의 상사를 떠나 인생의 선배로서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와준다. 그의 도움에 힘입어 주 조합장은 난관을 하나 둘씩 극복해 나간다. 먼저 자신에게 둘러쳐 있는 일부터 정리한다.

이어 동생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이해 당사자들을 만나 자신이 책임지겠으니 믿어 달라하고 20여 년에 걸쳐 부채를 갚기 시작해 지금까지 갚아 오고 있다. 이제 그 빚도 종착역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놈놈놈’ 등 뒤에 욕을 달고 살았으나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 온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본래의 그로 돌아간 그는 일에만 매달렸다. 특히 하청농협에서 출하된 물품에 대해서 거래처와의 신용을 쌓기 위해 최고의 물품들을 선별해서 납품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예로 유자나 죽순 치자 등 농민들이 조합에 물품을 가져 오면 자신이 직접 선별해서 좋은 것만 수매하기 때문에 농민들로선 무게가 덜 나가 수매량이 떨어져 매출고가 하락해 돈이 덜 되었다.

이 때문에 융통성 없는 놈, 독한 놈, 김일성 보다 더한 놈 등 그때는 등 뒤에 욕을 달고 살아 온 날들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 농협의 문제는 조합원들의 고령화에 있다고 말하는 주 조합장.
현재 농협의 문제는 조합원들의 고령화에 있다고 말하는 주 조합장.

또 그는 조합의 사업 다양성을 고민하다 2010년 거제백병원 장례식장 운영권을 거며 쥔다. 이때 자신 인생의 두 번째 은인인 거붕그룹 백용기 회장을 만난다.

며칠에 걸쳐 설득한 결과 백이사장이 주조합장의 열성에 감동해 하청농협과 계약을 허락하게 된 것이었다.

‘젊은 농협’ 주창…출향인도 하청농협 이용토록 유도

이렇듯 본인의 노력도 있겠지만 당시 조합장과 직원들의 노력이 더해져 하청농협은 중견 농협으로 성장하게 된다. 지난 해 연말 그는 30년 6개월 간 몸담았던 하청농협에서 퇴임해 불과 2개월 보름간의 짧은 기간에 현직 조합장을 누르고 당선된다.

주 조합장은 현재 하청농협 조합원들의 고령화에 대해 걱정했다. 고령화는 생산성 저하로 직결되기 때문에 후계 농협으로 전환해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들로 승계되어 조합을 젊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객지에 살고 있어도 하청농협을 이용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조합원 이용률을 높이는 것이 당면과제라고 했다.

‘네 박자 경영’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사람’을 만나라

끝으로 그는 경영방침에 대해 ‘네 박자 경영’을 기치로 내걸었다. 임원, 직원, 조합원, 고객이 경영에 참여해 한마음으로 나아가야 조합의 발전이 있다고 한다.

또 그는 전무 시절 직원들에게 스스로 노력하고 능동적인 근무태도와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라.

임원 직원 조합원 고객이 참여하는 네 박자 경영을 기치로 내걸었다.
임원 직원 조합원 고객이 참여하는 네 박자 경영을 기치로 내걸었다.

급여에서 일정 부분은 조합에 투자하라 너희들 월급은 조합원들이 주는 것인 만큼 조합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을 항상 갖고 다니라고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고 한다.

주 조합장은 이제 선거는 지나버린 과거라고 한다. 내 편, 네 편은 접어 두고 한마음으로 조합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또 선거 후유증을 최소화 해 오로지 앞만 보고 나아 갈 때라고 한다.

2010년 지금의 아내와 재혼한 그는 아들, 딸 2명의 자녀들은 이미 출가해 자신들의 인생을 위해 나아가고 있고 그는 아내와 단 둘이서 오손도손 살고 있다고 한다.

이제 주 조합장은 4년 동안 하청농협을 이끌어 가야 한다. 그의 말처럼 당선의 기쁨보다 책임의 무거움을 알고 있고 조합장은 조합과 조합원들을 위해 한사람의 봉사인이라는 마음가짐이 있기에 앞으로 하청농협의 더 나은 발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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