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1950 가려진 시간, 남아있는 눈물 거제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며
1947-1950 가려진 시간, 남아있는 눈물 거제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며
  • 윤광룡 기자
  • 승인 2018.12.0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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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shing Memories 잊혀지는 기억들

거제해금강테마박물관, 거제 민간인 학살 재조명

거제 민간인 학살 기억하다-가려진 시간, 남아있는 눈물 展
12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유경미술관 제3-5관에서 열려

거제 해금강테마박물관(관장 경명자·유천업)이 지난 1일부터 이달말까지 한 달간 유경미술관 3-5관에서 ‘1947-50 거제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다-가려진 시간, 남아있는 눈물’ 展을 개최하고 있다.

거제 민간인 학살사건은 역사적 사건임을 명확히 기억하지만 희생자들이 누구인지는 차츰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거제 민간인 학살은 40년대~50년대 이데올로기 대립을 배경으로 자행된 사건이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한창 진행되던 때 경남 마산 진해 통영 거제 일대에서 총으로 학살한 다음 이들 손과 발을 묶어 바다에 수장시켰다.

거제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보고서에 따르면 지심도 앞바다와 가조도 구조라 장승포 칠천도 옥녀봉 등지에서 민간인이 무차별 죽임을 당했다.

거제 민간인 학살 이후 거제도에서는 사건 자체가 은폐되어 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피하기 위해 사건 자체를 잊으려 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 하나 둘 국가보안법에 의해 옥살이를 하는 등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져 갔다. 심지어 집단으로 희생당한 경우, 유가족이 남아있지 않아 사건 자체가 사라진 경우도 있다.

2003년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래 진상조사가 시작되면서 유가족들에 의한 직접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져 학살 사건이 세상에 나왔다.

2014년 희생자 84명의 유가족이 국가로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통해 구제받은 사람들은 희생자들의 일부였다. 사건이 발생한지 70여 년이 흐른 지금, 진실을 알고 있는 유가족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당시 거제에는 좌익세력으로 구성된 빨치산 일부가 있었다. 이 때문에 민간인 희생이 많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보도연맹원에 가입한 죄 없는 사람들이 살해되기 시작했다.

거제 지역에서만 1000여 명이 적법한 재판절차 없이 수장 또는 총살 당했다.

 거제지역 민간인 학살 현황

1947년 9월 19일 연초면 다공리 희생자 수 3명
1949년 4월~5월 장승포 신사터 희생자 수 20명 총살
1949년 4월~5월 동부면 구천계곡 희생자 수 310명 총살
1949년 7월 연초면 송정리 뒷산 희생자 수 20-30명 총살
1950년 7월 27일 지심도 앞바다 희생자 수 72명(1명 도망) 수장
1950년 7월 27일 가조도 앞바다 희생자 수 50명 수장
1950년 7월 장목면 일대 희생자 수 15명 총살
1950년 7월 하청면 칠천도 부근 희생자 수 40명 수장
1950년 7월~8월 연초면 일대 희생자 수 40명 총살
1950년 8월 20일 지심도 앞바다 희생자 수 400명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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