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I의 과학향기] 망각은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나는가
[KISTI의 과학향기] 망각은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나는가
  • 거제뉴스아이
  • 승인 2018.09.1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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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기억이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것인가 적극적으로 지워지는 것인가

어제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가? 그저께는? 분명히 내가 보낸 시간들인데 그때 무엇을 했는지 단번에 기억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바로 하루 전에 일어난 일일지라도 한참을 곱씹어보기도 하고 어떤 일들은 끝끝내 떠오르지 않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늘 망각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망각에 대해 이야기하며 “잘 떠올랐던 것이 점차 희미해진다”고 말하곤 한다. 과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기억과는 별개의 기제가 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암호화하는 뉴런들 간의 연결이 점차 끊어지거나 뉴런들이 수명을 다해서 자연적으로 망각이 일어난다고 말이다. 이는 망각 과정을 기존의 기억이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는 수동적인 과정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최근 망각이 일어나는 기제를 연구한 신경과학자들은 뇌가 적극적으로 기억을 지우거나 숨긴다고 말한다.

내재된 망각: 우리 뇌는 항상 기억을 지워나간다

2016년 스크립스 연구소의 로날드 데이비스(Ronald Davis) 연구팀은 초파리에게 특정 기억을 학습시킨 뒤 그 기억이 세포 수준에서 어떻게 지워지는지를 관찰했다. 그 결과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망각을 유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통념과 달리 망각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수동적 과정이 아니라 뇌의 적극적인 편집 기제이다. (출처: shutterstock)
통념과 달리 망각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수동적 과정이 아니라 뇌의 적극적인 편집 기제이다. (출처: shutterstock)

도파민이 ‘버섯체뉴런(mushroom body neurons)’이라 불리는 세포에 분비되는 모습을 관찰했고, 여기서 버섯체뉴런이 도파민을 수용할 때 필요한 ‘스크리블(Scribble)’이라는 단백질이 발현되는 것을 막아 도파민이 버섯체뉴런에 분비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초파리의 기억력이 2배가 된 것을 확인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칭화대학교의 이종(Yi Zhong) 연구팀은 쥐의 해마(hippocampus) 내 뉴런에서 ‘Rac1’이라는 단백질이 망각을 매개한다는 내용의 연구를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는 쥐에게 특정 정보를 기억하도록 훈련시키고 Rac1의 활성을 억제하자 쥐의 기억이 유지되는 시간이 72시간 미만에서 최소 120시간까지 연장되는 것을 관찰했다.

데이비스와 이종은 2017년 공동으로 펴낸 리뷰 논문에서 도파민과 Rac1이 매개하는 망각 기제를 ‘내재된 망각(intrinsic forgetting)’이라 일컫고 이 기제는 뇌의 기본 상태로서 새롭게 기억한 바를 끊임없이 지워나간다고 언급했다. 이외에도 새로운 것을 기억함으로써 신경 세포가 발생하면 기존에 있던 기억이 지워지기도 한다.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망각이 기억의 자연스러운 소멸 과정이 아님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기억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우리 뇌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로버트와 이리나 칼린-제이지먼(Robert & Irina Calin-Jageman) 부부의 2017년 연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 뇌는 왜 능동적으로 기억을 지우고 편집하고 저장할까? 아마 망각은 뇌가 작동하는 효율적 방식 중 하나일지 모른다. (출처: shutterstock)
우리 뇌는 왜 능동적으로 기억을 지우고 편집하고 저장할까? 아마 망각은 뇌가 작동하는 효율적 방식 중 하나일지 모른다. (출처: shutterstock)

그들은 바다달팽이의 몸의 한쪽 절반에만 전기 자극을 가해 그쪽에서 더 큰 반사 반응이 일어나도록 학습시키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바다달팽이가 이전의 전기 자극을 망각해 몸의 양쪽이 전기 자극에 대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후 적절한 양의 전기 자극을 몇 차례 가했을 때 이전에 학습한 비대칭적인 반사 반응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 바다달팽이는 전기 자극에 대한 기억을 망각했지만 그 기억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카린-제이지먼 부부는 망각 후에도 기억이 잔존해 있음을 유전자 수준에서도 조사했다. 그들은 바다달팽이의 기억 저장과 관련된 1,200개의 유전자 중 11개의 유전자가 한쪽 뇌에서만 활성 상태에 있음을 확인했다. 전기 자극에 대한 망각이 일어난 이후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망각은 왜 일어나는 걸까? 우리는 매일 같이 뭔가를 기억한다. 그때마다 뇌는 기억하기 위한 신경 회로를 작동시킨다. 이도 모자라 기존의 기억들이 모두 활성 상태라면, 우리가 뭔가를 기억할 때마다 뇌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는 무한하게 늘어날 테고 우리가 흡수할 수 있는 에너지는 뇌를 유지하기에 턱도 없이 부족해질 것이다. 이런 비효율이 어디 있는가. 적극적인 망각의 기제들은 이런 비효율을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올리버 하르트(Oliver Hardt)의 통찰대로 “우리는 망각 없이 어떤 기억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글: 이보윤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일러스트: 유진성 작가
출처: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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