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 거제의 기타리스트 ‘김도연’이다
나는 대한민국 거제의 기타리스트 ‘김도연’이다
  • 영담 기자
  • 승인 2018.07.0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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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하나만 메고 전국 누비며 거제 알리는 메신저
‘거예모’ 결성, 호•영남 문화교류 이어 예술제 기획
“돈에 음악을 팔지 않는다”는 뚝심, 드디어 꽃 피워

 -프롤로그

기타리스트. 그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 상상한 것은 치렁치렁한 머리에 다듬지 않은 수염, 아무렇게나 옷을 차려입은 ‘히피’의 모습이었다. 일반인과 다른 첫인상도 그런 상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전통찻집 수연제. 반전은 거기에 있었다. 흔하디흔한 커피숍이 아니라 전통찻집에서 만나자 한 그의 정체성은, 그래서 일반적인 통념을 깨고 있었다.

외모에서 풍기는, 그리고 비하하는 말로 ‘딴따라’라는 통속적인 선입견을 넘어, 그와 대화하는 내내 자신만의 고집과 자존심이 말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진하게 묻어 있었다.

호탕하게 웃고 있는 기타리스트 김도연.
호탕하게 웃고 있는 기타리스트 김도연.

 

 -기타(Guitar)

김도연. 그는 대한민국 거제의 기타리스트다. 그가 기타와 만나는 과정은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과정만큼 복잡하면서도 약간은 서글프다.

먼저 그를 잠시 설명하자면 남해에서 태어났다. 5살 되던 해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 시대 종종 발생했던 풍경인데, 호적신고를 하는데 그의 이름이 없었다. 생일도, 태어난 해도 가물가물하던 그의 출생에 대한 해답을 찾은 곳은 ‘100일 사진이었다.

소설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작품이 탄생했던 그해, 그는 태어났다. 100일 사진에 찍은 날짜가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호적에는 엉뚱하게도 1966년으로 등록됐다(이 또한 그 시대라 가능했던 풍경).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 김도연이었다. 초등학교 때 이미 하모니카와 피리를 자유자재로 연주했다고 한다. 가난했던 그가 쉽게 구할 수 있는 악기이기도 했다.

김도연은 남해에서 태어나 5세 되던 해 부산으로 이사했다.
김도연은 남해에서 태어나 5세 되던 해 부산으로 이사했다.
"클래식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이렇게 됐다."
"클래식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이렇게 됐다."

고등학교 때 음악대학 진학을 위해 클라리넷을 전공했다. 그런데 그놈의 질긴 인연 가난은 그의 꿈을 좌절시킨다. 1980년대 당시 중고 클라리넷의 가격이 70만원을 넘고 정품의 가격은 150만원을 호가했다. 당시 그의 고등학교 공납금이 83000원이었다고 하니 악기 구입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음악에 대한 목마름은 해결해야겠고,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기타였다. 가난한 음악도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친서민적 악기였다. 또한 모든 장르에 적용 가능한 악기이기도 했다.

“(가난만 아니었다면)본래 클래식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이렇게 됐다.”

하소연 같으면서도 은근한 자존심이 묻어나는 말투다. 누구의 가르침 없이 독학으로 기타를 공부해서 이 만큼 성장한 자신에 대한 자찬(自讚) 쯤으로 해석하자.

 -기타(Guitar) ②…Go Island

그와 거제의 인연은 땜방으로 시작됐다.

“1992년 거제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연락이 왔다. 기타를 치는 친구가 예비군훈련으로 3일간 빠져 문제가 생겼다. 아르바이트로 3일만 거제에서 연주해 달라.”

1992년 우연찮게 거제와 인연을 맺었다.
1992년 우연찮게 거제와 인연을 맺었다.

기타리스트로 부산에서 활동하며 기타학원을 겸하던 그에게 들어온 아르바이트는 거제에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

“3일만 있다가 오자고 생각했는데 거제에 반해버렸다. 가는 곳곳 아름답지 않은 풍경이 없었다는 말로 당시 그가 거제에서 느낀 첫인상을 이야기했다.

특히 그는 단 3일의 연주지만 무대에 오르기 위해 매일 곡 연습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잘 아는 곡이지만 열심히 연습하는 그의 모습에 밴드의 리더가 감동하고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해왔다는 것.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거제. 생에 처음 온 낯선 곳이지만 결정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은 이유였다.

당장 부산에 있던 학원부터 정리했다는 말로 그의 거제행을 대신했다.

 -기타(Guitar) ③…게리 무어와 산타나

기타리스트 김도연은 서기 19994기 멤버다. 유명 뮤지션으로 이 그룹의 1기와 2기에서 활동한 가수 조항조씨가 있으며 3집 앨범의 포구가 히트곡이다. 주로 연주한 장르는 록(Rock)에 가깝다.

하지만 정작 이 그룹에서 기타를 연주했던 김도연이 좋아하는 장르는 블루스(Blues)’. 그가 즐겨 연주하는 곡도 블루스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블루스 기타의 전설이라는 게리 무어(Gary Moore)스틸 갓 더 블루(Still got the Blues)’나 산타나(Santana)의 곡을 그는 좋아한다고 했다.

국내 곡을 연주할 때도 블루스의 대가 김목경씨의 곡이 주를 이룬다. 또한 한국 기타리스트의 전설적 존재인 신중현의 곡도 종종 연주한다.

김도연이 즐겨 연주하는 장르는 블루스다.
김도연이 즐겨 연주하는 장르는 블루스다.

그가 부산에서 활동할 당시 기억에 남는 장면은 게리 무어의 스틸 갓 더 블루를 연주했던 공연이라고 했다. “연주를 들은 영국인이 깜짝 놀라서 그를 향해 엄지 척을 쉴 새 없이 날렸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그가 연주하는 장면을 옆에서 감상한 개인적 의견으로 그가 블루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애드리브(Ad lib)’가 아닐까 싶었다. 이날 깜짝 방문한 필자를 위해 연주한 ‘Tombe la neige(눈이 내리네)’를 들으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통기타로 곡을 연주하면서 스트로크보다 아르페지오 주법을 많이 쓰고 전자기타에 특화된 풀링과 햄머링 기법을 선호했다. 곡 중간에 이러한 주법을 통한 애드리브가 많은 것 또한 그가 블루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짐작된다.

 -기타(Guitar) ④…싱어송라이터

김도연 또한 기타리스트지만 자신의 창작곡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50~60곡 정도 된다는 게 그의 귀띔이다.

그의 창작곡 중 거제를 주제로 꿈의 거제도별 하나 솟아 섬이 되었다는 곡이 대표작이라고 소개했다. ‘별 하나 솟아 섬이 되었다'(영상)는 이행규 전 거제시의원의 수필집 제목에서 따왔다고 한다.

수필집 제목을 보는 순간 영감이 왔다. 당장 이행규 시의원에게 연락해서 같은 제목의 노래를 만들어도 되겠느냐 물어보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다.”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거제 예술하는 사람들의 모임(거예모)’을 통해 발표했다. 하지만 거제를 사랑하는 그가 작곡한 노래들이 조명받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노래에 대한 호불호야 있겠지만 누가 들어도 괜찮은 곡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좋은 노래로 들렸다(개인적 생각).

창작곡과 함께 그가 공들이는 부분은 명상음악이다. 원불교의 지원을 받아 명상음악 몇 곡을 작곡하고 두 번의 발표회도 가졌다고 한다. 79일에는 광주방송국에서 명상음악 관련 녹화가 예정돼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기타를 연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김도연은 앞으로는 창작곡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말로 음악적 변화를 암시하기도 했다.

 

 -돈에 음악을 팔지 않는다

아무데나 가는 음악은 하지 않는다. 또한 싼 값에 오라고 해도 무작정 가지 않는다.”

처음 음악을 할 땐 공연을 돈으로 생각했다는 김도연은 공연 개런티에 따라 음악의 수준이 다르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하지만 음악을 20년 정도 할 무렵 숱한 음악의 고수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가치관이 새롭게 정립됐다고 했다.

돈이 가치의 기준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가 가치의 기준이 됐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 많은 돈이 들지만 제대로 된 임자만 만나면 돈 없이 공연을 다녔다. 공연을 결정하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자신만의 음악적 고집이 이제 빛을 보려나.
자신만의 음악적 고집이 이제 빛을 보려나.

이런 가치관의 변화는 단기적으로 손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그에게 이익을 가져다 줬다고 했다.

돈이 없어도 음악을 열심히 하다 보면 돌고 돌아서 내게로 온다. 15년 정도 가치관에 따라 하다 보니 사람들이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됐고, 그런 인연으로 다른 공연을 연결해주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사자는 굶어 죽어도 풀을 뜯지 않는다는 말처럼 음악에 대한 그의 고집이 제대로 보상을 받고 있었다.

 -기타 하나만 메고 전국으로

세상에 결국 공짜는 없었다. 반드시 베푼 만큼 빚을 갚는다. 그래서 어쩌면 (무료공연을 하더라도)마음이 더 편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전라도에서 환영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강원도 빼고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공연을 다녔다는 김도연은 특히 전라도에서 사랑받는 기타리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좋은 공연이면 돈을 앞세우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과 전라도 특유의 넉넉한 인심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그런 인연은 6년 전부터 문화교류로 이어지고 있다.

보통의 경우 영남을 앞세워 호남이라고 하지만 나는 영남 문화교류라고 명명했다.

호남에 대한 배려였다. 처음에는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도 있었고 호남 사람들조차 어색해 했다. 질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진심을 알고 난 뒤 사람들이 이제는 당연하게 생각한다. 거제 사람들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거제에 정착했지만 공연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든 마다하지 않은 그는 결국 기타 하나만 메고 전국에 거제를 알리는 첨병이 됐다. 공연을 통해 맺어진 인연은 문화교류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그를 공연을 설계하는 기획자로 만들었다.

 -세계평화예술제

기타 하나의 힘은 컸다. 광주에서 진도, 벌교 등 전라남도는 물론 전주, 익산, 정읍 등 전라북도에서도 김도연은 환영받는 문화·예술인으로 성장했다. 거제의 이름이 덩달아 높아진 것은 두말할 이유가 없다.

전북 정읍과의 인연은 차마고도 예술단으로 이어지고 문화·예술인 김도연은 오는 99일로 예정된 대한민국 차마고도 평화예술제(세계평화예술제)’를 총기획하는 기획자로 거듭나게 했다.

세계평화예술제를 알리기 위해 오는 716‘KBS 문화산책에 출연을 결심한 김도연은 거제의 문화·예술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그리고 거제의 문화·예술에 대한 노력을 전국에 알리기 위해 출연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자신이 기획하는 세계평화예술제에 거제의 문화·예술인들을 초대하고 싶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는 거제의 친분 있는 문화·예술인들을 초대해 안목을 넓히고 더 크고 다양한 문화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다고 전했다.

 -가르치려면 더 많이 공부해라

거제의 문화·예술계에는 거인이 없다. 문화교류를 통해 통념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

거제에 정착한 뒤 초기 통영에서 더 많은 활동을 이어간 김도연은 지금 유행하는 버스킹을 처음으로 도입했다고 했다. 현재 통영의 각종 라이브클럽에서 연주하는 기타리스트 대부분이 자신의 제자라고 덧붙였다. 그들에게 애정도 많이 쏟았다고 했다.

그러던 2011년 통영에서의 모든 활동을 정리하고 거제에서 거예모(거제 예술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했다.

거예모를 결성하면서 아마추어는 모두 정리하고 제자를 육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했다. 가요, 국악, 사물놀이 등등 예술 장르를 따지지 않았다.”

그가 거예모를 결성한 이유는 거제의 문화·예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서 인선 또한 제자를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검증된 사람들로 구성했다. 새로운 세대를 이어가고 더 다양한 예술의 접목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제자를 기르고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스승들이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과의 문화교류를 통해 스스로가 빠져있는 통념을 깨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교류의 중요성을 역설한 김도연은 2014416일 발생한 세월호 사태를 계기로 호영남 문화교류의 싹을 틔웠다.

 -거예모와 호영남 문화교류

세월호 사태가 터졌을 때 거예모 회원들이 진도로 내려갔다. 영남 문화교류가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다. 거제의 독특한 문화공영인 영등오광대놀이를 진도에서 최초로 공연했다.”

당시 영등오광대놀이를 처음 접한 전라도 사람들은 감동에 빠졌다고 했다. 영남 문화교류의 첨병인 셈이었다.

이어서 벌교 꼬막축제에 오광대놀이가 초청됐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발생했다.

“2시간짜리 오광대놀이 공연을 위해 이미 만들어졌던 팜플렛이 다시 제작됐다. 뒤늦게 공연이 잡히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만큼 오광대놀이가 그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셈이다. 정말 융성한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부분에서 해석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일단 거예모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제자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해 능력있는 사람들이 공연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능력있는 사람들도 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김도연은 거제의 문화를 알렸고 문화교류의 장을 열었던 것이다.

 -에필로그

김도연은 대한민국 거제의 기타리스트다. 그는 열정이 많다. 기타 하나만 메고 전국을 누비고 그곳의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 스스로가 고수이지만 배움을 주저하지 않는다.

새로운 도전도 흥미롭게 받아들인다. 거예모를 결성하고 호영남 문화교류를 실현시킨 김도연이다. 이제 세계평화예술제를 기획하는 기획자라는 명함도 가슴에 달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그는 천상 기타리스트다. 기타 하나만 있으면 행복하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애드리브를 즐겨하는, 블루스를 사랑하는 뮤지션이다.

그래서 그는 복잡한 문화·예술인이면서도 단순한 기타리스트다.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김도연.

그를 직접 만나는 것이 그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수연제를 불쑥 찾아가 보면 김도연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용한 찻집, 수연제.
조용한 찻집, 수연제.

 -연초천 인근 아름다운 찻집 수연제’ 

처음 수연제에 발을 들이는 순간 거제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찻집이 드문데다가 연초면의 연초천 주변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에서 느끼는 것처럼 순수 우리말이 아닌 한자로 된 상호에 틀림없었다. 입구에 기와로 된 간판이 작게 있었다.

해서인지 행서인지도 모르겠고 변형된 한자라는 정도만 알겠다. 한자를 도통 모르는 필자지만 그래도 아는 한자 하나는 있어 연꽃 ()’자는 찾았다. ‘자 또한 어림짐작으로 찾은 글자가 변두리 ()’였다. 이 제자는 만나다는 뜻도 있다.

자는 도통 찾을 수가 없다. 연꽃을 모티브로 수련(睡蓮)을 상상했지만 아무리 봐도 모양이 틀리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이쯤에서 넘어가자.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수연제에 연락하면 될 것이고.

김도연은 수연제에 거의 살다시피 한다. 집은 동부면 유천리에 있는데 활동하는 이외의 시간은 수연제에 더 많이 상주한다. 수연제 정지일 사장과 인연이 깊기 때문이다.

김도연 단장과 정지일 사장(가운데), 그리고 샤프렌 야농.
김도연 단장과 정지일 사장(가운데), 그리고 샤프렌 야농.

인연의 시작은 인도철학이다. 김도연의 모습을 보면 인도의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바바 하리다스가 떠오르는 이유가 있었다.

정지일 사장이 먼저 인도철학에 심취했고 관련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한자를 찾기 힘든 수연제. 필자가 도출한 해석이 맞다면 수연제는 수련(睡蓮)을 만나는 곳, 아니면 수련(睡蓮)이 핀 주변, 연꽃 받침 정도로 해석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김도연과 수연제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수련을 문화·예술의 정화(精華)로 보면 그것을 추구하는 김도연은 수연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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