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야구계의 덴노(天皇)’ 김경홍(카네다 마사이치 金田 正一)
‘일본 프로야구계의 덴노(天皇)’ 김경홍(카네다 마사이치 金田 正一)
  • 김갑상 기자
  • 승인 2017.12.2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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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열전(在日同胞 列傳)➊

-일본 프로야구계 ‘천황’으로 불리운 사나이
-불과 24세의 나이에 통산 200승을 달성
-64회 3분의 1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 달성
-자이언츠, 등번호 34번 영구결번으로 지정

일본프로야구계의 천황 김경홍, 그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꿋꿋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한 위대한 한국인이었다. 지금도 그가 이루어 놓은 위대한 기록들은 아직도 신성불가침의 존재다. 한때는 결혼과 동시 일찍 귀화한 탓에 우리 국민들로부터 장훈과 달리 ‘쪽발이‘ ‘매국노’라 손가락질을 당했다. 일본에선 조센징, 한국에선 쪽발이라 설움 받았지만 훗날 그는 한국야구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조언과 지원도 서슴지 않았다.


고교시절의 김경홍.
고교시절의 김경홍.

NPB(일본프로야구)통산 400승 298패, 4490탈삼진, 통산방어율 2.34, 14년 연속 20승 이상, 퍼펙트게임 1회, 노히트노런 2회 등 도저히 인간이 창조한 기록으로 믿기지 않는 이 모든 것을 만든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일본 프로야구계의 ‘천황’으로 불리던 전설의 사나이 카네다 마사이치, 한글명 ‘김경홍’ 재일동포 2세다. 아버지 고향은 경북 상주이고 어머니는 대구 출신이다.

1933년 8월 1일, 일본프로야구 위대한 전설 김경홍이 아이치현(愛知県) 나카시마군(中島郡) 헤이와촌(平和村, 현재・이나자와시-稲沢市)에서 태어난다.

그가 야구를 처음 시작한 것은 나고야 시내에 있는 시립중학교시절이었다. 졸업 후 나고야 전기(電機)학교에 입학하지만 1학년 도중 인근 교에이(亨榮)상고로 전학한다. 그곳에서 그는 야구부장 겸 감독인 시바 시게오(芝 茂夫)를 만난다.

김경홍은 감독의 가르침에 따라 투수로서의 가장 중요한 하체를 단련하기 위해 매일 달리기를 반복한다. 먼 훗날 그는 “내 야구인생의 원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정도로 하체단련을 위해 혹독하게 연습 한 것을 추억한다. 또 그는 감독의 그림자를 밟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키워 주고 가르친 시바 시게오를 존경했다.

김경홍은 1학년 재학시절엔 여름의 고시엔(甲子園)에 후보선수로 출전했지만 등판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2학년에 올라가면서 팀의 에이스로 봄 · 여름 고시엔에 출전한다. 결과는 팀의 패배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지만 전문가들로부터 강속구와 커브는 당장 프로에서도 통한다는 호평을 받는다.

고쿠테츠 시절의 김경홍.
고쿠테츠 시절의 김경홍.

1950년 김경홍은 3학년 재학 중 그해 3월에 창단한 고쿠테츠(國鐵) 스왈로즈(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스카우트 된다. 전설의 시작이었다.

그가 험난한 강호에 발을 들인 후 첫 선을 보인 것은 대(對) 히로시마(廣島)전이었다. 결과는 밀어내기 끝내기 사구(四球)로 패하면서 프로세계의 쓴 맛을 경험한다. 하지만 17세의 어린 나이로 시즌 도중 8월에 데뷔한 그는 그해 완봉승 한차례 포함 8승 12패 방어율 3.94의 준수한 기록을 남긴다.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일 무렵 김경홍은 프로무대 2년차를 맞이하면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107게임 중 44시합에 선발 등판한다. 9월 5일 대오사카(大阪) 타이거스(현 한신타이거스)전서 노히트노런를 달성한다. 태어난 지 18세 35일만의 거사였다. 사상 최연소기록이기도 했다.

그해 22승을 수확하고 이후 14연속 20승 이상을 기록한다. 1954년 8월 8일 경기에서 다혈질인 김경홍은 당시 주심에게 볼 판정에 불만을 품고 폭언을 하면서 생애 최초로 퇴장을 당한다. 이 사건은 역대 퇴장 랭킹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그에겐 서막에 불과했다.

1957년 8월 21일 김경홍의 선발등판 상대는 주니찌(中日), 그라운드엔 한여름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컨디션 난조에도 불구하고 김경홍은 퍼펙트게임을 달성한다. 그것도 달성직전 9회 원아웃에서 하프 스윙 볼 판정에 대해 주니찌가 43분간 격렬하게 항의한다.

김경홍의 젊은 시절.
김경홍의 젊은 시절.

이 행위는 김경홍의 어깨가 식어 퍼펙트게임의 수모를 벗고자하는 주니찌 측의 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경기 속개 후 벤치를 나오면서 “6구면 충분하다. 지친 동료 선수들을 위해 꼭 그렇게 끝내겠다”면서 투지를 불태웠다.

경기는 그의 주문처럼 두 타자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자신의 예언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완전시합이었다. 일본프로야구 공식전에서 좌투수가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선수는 지금도 김경홍이 유일하다.

1958년 4월 5일 개막전 상대는 교진(巨人), 일본프로야구의 또 하나의 위대한 전설 나가시마 시게오(長嶋 茂雄)의 프로 데뷔전이기도 했다. 이 시합에서 김경홍은 나가지마를 4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프로의 매운 맛을 보여준다.

그 다음 경기에서도 나가시마는 2연속 삼진을 당한다. 김경홍은 그해 통산 200승을 달성한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또 6월 12일에는 개막 후 70일 만에 20승을 올리는 괴력을 발휘한다. 9경기 완봉을 포함하여 20승 2패 방어율 0.57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다.

그리고 64회 3분의 1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화려한 금자탑을 세우기도 한다. 1959년에는 일본프로야구계의 또 하나의 괴물 오 사다하루(王貞治)가 4월 11일 개막전에 등장, 김경홍에게 도전장을 내밀지만 2타수 2삼진으로 돌려세우며 매운맛을 보여 주기도 했다.

교진 시절의 김경홍.
교진 시절의 김경홍.

1962년 6월 30일에는 3509탈삼진을 빼앗으며 종전 일본프로야구 월터 존슨이 가지고 있던 3508탈삼진 기록을 뛰어 넘는다. 1963년 6월 30일에는 통산 311승을 달성, 벳쇼 타케히코(別所毅彦)가 가지고 있던 최다승 기록마저 갈아치운다. 그해 그는 30승을 달성한다.

이 기록은 이후 센트럴리그에서는 그 누구도 이 기록을 뛰어 넘는 투수는 나오지 않았다. 1964년까지 김경홍은 14연속 20승 이상을 달성한다. 통산 353승, 교진전에만 65승을 거둔다. 그가 고쿠테츠 시절 거둔 353승 중 히로시마에게 83승을 챙겨 교진, 히로시마 킬러로 불리기도 했다.

1965년 김경홍은 코쿠테츠를 떠나 교진으로 이적한다. 입단 후 그의 연습량을 보며 동료들이 깜짝 놀란다. 일본프로야구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운 위대한 투수가 신인보다 더 열심히 뛴다며 혀를 찰 정도였다. 이적 후 그가 거둔 성적은 47승에 불과하지만 일본시리즈 9연패 달성에 공헌한다.

영구결번 34번.
영구결번 34번.

또 그가 교진에 몸담은 5년 동안 일본시리즈 제1선발 3회, 페넌트레이스 개막전 4회에 걸쳐 선발등판하기도 했다. 당시 교진 가와가미 감독은 김경홍의 큰 무대 경험을 높이 사 결정적인 시합에는 항상 김경홍을 선발로 내세웠다.

1969년 10월 10일 주니찌전에서 김경홍은 통산 400승을 달성한다. 그는 400승 달성 후 은퇴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스스로도 나는 아직 건재하다. 앞으로 100승은 더 거둘 수 있다며 주변의 은퇴설을 일축했다.

하지만 당시 구단주 이시하라 신타로는 그에게 “그 누구도 당신이 얻어맞는 경기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김경홍(카네다 마사이치)이니까” 그 말에 감동한 그는 미련 없이 은퇴를 선언한다. 교진구단은 그의 등번호 3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

은퇴 후 그는 일본 텔레비전 해설가, 탤런트로 활약하기도 했고 1973년부터 1978년까지 롯데 오린온즈(현 롯데 마린즈)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1974년에는 리그 우승과 더불어 일본시리즈까지 제패하는 영광을 누린다. 감독 퇴임 후 김경홍은 일본 명구회(名球会) 회장까지도 역임한다.

롯데감독 재임시절 우승 후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롯데감독 재임시절 우승 후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김경홍의 현재 모습.
김경홍의 현재 모습.

일본프로야구계의 천황 김경홍, 그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꿋꿋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한 위대한 한국인이었다. 지금도 그가 이루어 놓은 위대한 기록들은 아직도 신성불가침의 존재다.

한때는 결혼과 동시 일찍 귀화한 탓에 우리 국민들로부터 장훈과 달리 ‘쪽발이‘ ‘매국노’라 손가락질을 당했다. 일본에선 조센징, 한국에선 쪽발이라 설움 받았지만 훗날 그는 한국야구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조언과 지원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도 일본야구의 다른 기록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김경홍이 세운 기록들은 인정하고 있다. 때로는 하루에 2승씩 거두는 강철같은 체력과 불꽃같은 집념으로 일본야구계를 평정한 불꽃의 사나이 김경홍, 인류에 야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의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소금의 가치는 소금을 다 썼을 때 알게 되고, 에이스의 가치는 에이스를 잃고 나서 깨닫게 된다."
ㅡ고쿠데츠 스왈로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남긴 말.

자료출처 : 야후 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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